관객과 배우

아침노을과 저녁노을_이덕무

갑자기여인 2018. 5. 3. 21:56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고 옮김

『문장의 온도에서

 

 

아침노을과 저녁노을

 

 

아침노을은 진사(辰砂)처럼 붉고

저녁노을은 석류꽃처럼 붉다

                           - 『이목구심서2

 

 

진실로 형용과 비유가 잘된 아름다운 문장이다. 여기에 무엇인가 더 보태려 한다면 군더더기가 되고 말 것이다. 묘사하거나 표현하려고 한 것을 다했다면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글은 완성된 것이다. 소품문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말똥구리와 여의주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_『선귤당농소』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필요없는 물건이다. 용 역시 자신의 여의주가 귀한 만큼 말똥구리에게는 말똥이 귀하다는 것을 안다. 비록 상상의 존재지만 우주 만물 중 가장 귀한 동물로 여겨지는 용의 여의주와 가장 미천한 동물로 여겨지는 말똥구리의 말똥의 가치는 동등하다. 이제 우열과 존귀와 시비의 이분법은 전복되고 해체된다.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중략)

 

 

봄비와 가을 서리

 

봄비는 윤택해 풀의 싹이 돋는다.

가을 서리는 엄숙해 나무 두드리는 소리에 낙엽이 진다.

                                                                                      _『선귤당농소

 

 

지봉 이수광은 시나 문장은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그쳐야 할 곳을 알아야 좋다고 말했다. 산문보다 더 긴 시도 좋고, 시보다 더 짧은 산문도 괜찮다. 어떤 장애도 없고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글을 쓰는 것. 그것이 바로 소품문이 추구하는 정신이자 가치다. 극도로 절제된 표현과 간략한 묘사는 어떤 글보다 강한 여운과 여백의 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