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글, 그 안의 나_이원화 에세이

이원화 에세이 <꽃, 글, 그 안의 나>_레미제라블과 용주

갑자기여인 2018. 12. 14. 21:25

 

                                                                       운정회꽃꽂이작품집 '......94" 에서

 

 이원화 에세이

꽃, 글, 그 안의 나』중에서

 

 

                                       레미제라블과 용주

 

 

       둥글게 둥글게, 차가운 눈꽃은 잘 뭉쳐지지 않지만 열심히 또 하나를 만들어요. 주목 잎으로 양쪽 눈썹을 붙이고 낙엽 한 개로 입을 만들고. 할머니 빨간색 털장갑을 막대기에 끼워 한 손은 올리고 다른 손은 내려뜨렸어요. 오랜만에 만든 눈사람이라 신기하고 예뻐서 저도 모르게 껴안아 보고 뽀뽀도 했어요.

       자카르타에서 온 손자가 만든 눈사람 이야기다. 손자가 다니는 영국인학교는 겨울방학이 짧아 여름방학을 이용했는데 올해는 겨울에 왔다. 그림으로만 보던 흰 눈을 만지고 싶었던지, 녀석은 눈길에서 미끄럼을 타 듯 휙휙 앞장 서 갔다. 갑자기 흰 눈 위에 벌러덩 눕고 엎어지기도 한다. 눈 쌓인 겨울 산을 겁 없이 오르다가 할아버지의 제지를 받고 나무꾼에 쫓기는 토끼인 양 내려온다. 결빙된 눈덩이를 축구선수 박지성 같이 두 발로 갖고 놀더니, 바윗돌 크기의 얼음을 번쩍 들어 장미란 같이 힘자랑을 한다. 아직 충족 되지 않았나 보다. 눈 쌓인 소나무 숲에 들어가 윗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한다. 맨 몸으로 두 팔을 흔들며 하나 둘 외쳤다. 옷을 입히려고 아드등아드등하였지만 녀석은 즐겁게 도망 다닌다.

       손자와 함께 영화관에 갔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12세 이상 관람 가 등급이다. 매표원이 묻지도 않는데, 손자를 가리키며 얘는 12살 6개월이라고 하였다. 만화영화로 알고 팝콘이나 먹으며 시간을 때우려 했다. 만화가 아니었다. 뮤지컬로 화면에서 쏟아지는 웅장한 화음과 큰 영상에 눈이 휘둥그렇게 된다. 나는 스크린을 보며 음악을 듣고 자막 볼라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데, 녀석은 여유 있게 몸을 약간 흔들며 영화 속에 푹 빠져있다. 팝콘과 콜라가 그냥 남아 있고, 상영시간이 좀 긴 듯했지만 나오면서 손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제일 좋았니? 노래가 립싱크가 아니고 배우들이 실제 라이브로 불러서 실감이 났어요. 뭐 립싱크가 아니라고, 늦은 점심으로 피자 한 판을 주문해 놓고서, 또 넌 무엇을 느꼈니? 꽁꽁 얼어붙은 사람이라도 사랑만 있으면 녹아버리는 것을 느꼈어요.

       새해 아침,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아침을 맞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가족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디카 앞에 쭈르르 모였다. 깜빡깜빡 행복을 담아 마음에 하나하나 찍어 넣었다.

       하루가 저물었다. 할아버지는 안방으로. 녀석도 엄마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뒷정리를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녀석이 슬그머니 빠져 나온다. 얼른 안방 문이 닫혔나 확인 한다. 할머니, 라면 없어요? 고등학생인 누나가 밤늦게 라면 끓여먹는 재미로 할머니와 함께 자고 갔다는 말을 들었나보다. 컵라면을 가지고 와 끓는 물을 부었다. 5~6분을 기다려도 익지 않아 냄비에 다시 넣고 끓이면서 얘, 만두도 두어 개 넣을까? 했더니 우리 할머니, 최고라며 두 손가락을 흔들었다. 숨죽이며 몰래 먹는 맛이란 세상에서 최고다. 거실에 나란히 누웠다.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맛있는 것을 싫도록 먹을 수 있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용주 아범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5층까지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곳의 경비원이 되고 싶다는 말이 생각나서다. 아들 눈에는 아저씨가 자전거만 타고 이리저리 다니는 것이 최고로 부러웠던 것 같다. 지금 손자는 충분히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데. 되물었다. 그래, 부엌에서 일하는 요리사 말이냐? 그건 아니고요, 지식을 총동원해서 말을 이었다.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려면 각국의 음식은 다 알아야하고 그 재료는 물론 그 나라의 문화, 전통 역사를 알아야하며, 다른 분야보다 더 많은 지식과 뛰어난 식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한다. 언제 그 마음을 먹느냐? 그건 몰라요. 그래 너는 영어를 잘 하니까, 다 할 수 있지, 그래도 할머니는 네가 다른 것을 공부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흰나비 같은 눈이 아침 창문을 두드린다. 샤워를 마친 녀석이 콧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가 무슨 노래지, 손자와 함께 유트브에서 레미제라블을 찾아 노래를 배운다. 어느 시인은 '아들은 인연의 가지 끝에 열린 하나의 과일'이라 표현했다. 그럼 손자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