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열쇠 없는 집_반숙자

갑자기여인 2019. 10. 15. 21:30

 

 

반숙자 수필집

《천년숲》

「열쇠 없는 집」

 

 

 

 

……

……

"누추한 집을 찾아오셨군요. 고요한 산천에서 하룻밤 단잠이 들었다면 감사합니다. 제왕이라 할지라도 고대광실에서 잠 못 들어 한다면 제왕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는 낮에는 땀 흘리며 고달프게 일하고 저녁이 오면 순한 사슴처럼 단잠에 빠져드는 농사꾼입니다.

 

손님, 무엇이 그대를 이 골짜기를 찾게 했는지는 모르나 혹시 저지른 실수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지요. 실수 한 번 했다고 불행해하지 마세요. 누구나 실수는 하잖아요. 그 실수 때문에 숨어살아야 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너무 아깝지 않아요. 실직? 실연? 내 맘대로 상상해 봅니다.

 

그대는 내 집에 오신 손님일진대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건너 방에 가면 쉼멜표 피아노가 있습니다. 40년 전에 멈춰버린 시간의 단절 속에 이제는 녹슬고 낡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님, 부탁컨대 무슨 노래든지 한 곡조만 쳐보시기 권합니다.

나는 가끔 세상일이 꼬이고 힘이 들 때면 이 피아노에 앉아 천천히 몇 곡을 칩니다. 엊그제는 '즐거운 나의 집'을 쳤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처져 제 음향이 아니었으나 조율하지 않은 피아노 소리는 그대로 또 다른 여운이 있었습니다.

 

손님, 그대의 삶도 지금 조율이 되지 않아 힘겨운 것은 아닌지요. 만약 여름에 이곳에서 새벽을 맞이했다면 밭으로 나가보세요. 그리고 밭 끝에 앉아 낮게 고개 숙여 자라는 푸른 생명들을 바라보세요. 도전하며 성장하는 곡식들이, 서로 서로 어깨를 비비며 자라는 풀꽃들이 분명 당신에게 무슨 말을 속삭여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동산에 떠오르거든 책장 안쪽에 넣어둔 잘 익은 포도주로 새 출발을 위하여 축배를 드세요. 손님, 땀 흘린 만치 돌려주는 자연의 선물을 한 아름 받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내려가세요. 모쪼록 내가 없을 때 조용히 다녀가세요.

 

다시는 이 집에 오실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주방 식탁 위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라면과 물을 넉넉하게 준비해 놓고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열쇠 없는 꺼벙한 집이 한없이 자유스러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