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섬진강 12_김용택

갑자기여인 2019. 12. 2. 13:56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4

 

 

섬진강 12

아버님의 마음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세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순도순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는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도착화되질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섬진강 8

 

달이 불끈 떠오른다.

첩첩산중 달 떠오면

그대는 장산리 마을회관 술집을 나선다.

시린 물소리로 강물을 건너

갈대들이 곱은 손 들어 가리키는

어둔 산굽이 강길을 따라 끄덕끄덕 걷는다.

내 친구,

서울에서 돈 못 벌고

중동을 다녀와도 어쩐지 우리는 못산다며

첩첩산중으로 못난 여자 데리고

검은 염소 몇 마리 끌고 돌아왔지.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

소주 몇 잔 거나하게 걸치고

강길을 홀로 걷는 그대는 내 친구.

겨울 시린 달빛 강물에 떨어져 어는데

어둔 산 밑 달그늘 속

담뱃불 빤닥이며

그대 여자 홀로 기다리는 깊은 산속으로

라면 몇 봉지 지게에 달고

서리 끼는 풀들을 밟고 헤치며

달빛 돌아오는

산굽이를 흥얼흥얼 돌아간다.

인생 쓴맛 단맛 다 본 내 친구.

슬레이트 지붕

밧데리 불빛 깜박이는 산속으로 가는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