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4 』
섬진강 12
아버님의 마음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세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순도순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는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도착화되질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섬진강 8
달이 불끈 떠오른다.
첩첩산중 달 떠오면
그대는 장산리 마을회관 술집을 나선다.
시린 물소리로 강물을 건너
갈대들이 곱은 손 들어 가리키는
어둔 산굽이 강길을 따라 끄덕끄덕 걷는다.
내 친구,
서울에서 돈 못 벌고
중동을 다녀와도 어쩐지 우리는 못산다며
첩첩산중으로 못난 여자 데리고
검은 염소 몇 마리 끌고 돌아왔지.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
소주 몇 잔 거나하게 걸치고
강길을 홀로 걷는 그대는 내 친구.
겨울 시린 달빛 강물에 떨어져 어는데
어둔 산 밑 달그늘 속
담뱃불 빤닥이며
그대 여자 홀로 기다리는 깊은 산속으로
라면 몇 봉지 지게에 달고
서리 끼는 풀들을 밟고 헤치며
달빛 돌아오는
산굽이를 흥얼흥얼 돌아간다.
인생 쓴맛 단맛 다 본 내 친구.
슬레이트 지붕
밧데리 불빛 깜박이는 산속으로 가는
그대는 누구인가
내 친구.
'관객과 배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화여고 '59 동기모임 /송년축하 (0) | 2019.12.10 |
---|---|
허형만_겨울 들판을 거닐며 외 4편 (0) | 2019.12.06 |
이석원 산문_<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중에서 (0) | 2019.11.25 |
이우환_멈춰 서서_파편3,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0) | 2019.11.13 |
추심_정태준 시. 곡 (0) | 2019.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