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허형만_겨울 들판을 거닐며 외 4편

갑자기여인 2019. 12. 6. 21:29

『月刊文學』2019년12월(610호)에 실린 허형만 시인 작품을 아래에 게재.

 

이 시대 창작의 산실 ㅣ 대표작

허형만 시인/ 1945년 전남순천 출생, 1973년 월간문학에 시, 1978년 아동문예에 동시로 등단 시집 『불타는 얼음』외 다수

                  한국예술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수상, 현재 목포대학교 명예교수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밭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영혼의 눈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

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

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

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  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

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뒷급

 

구두 뒷급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급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비스듬히 닳아 기울어 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녹을 닦으며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혀 있는

회한의 슬픔 역시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 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오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가랑잎처럼  가벼운 숲  

 

숲길 누리장나무 아래

검정 상복을 입은 개미들이

참매미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이미 여름은 끝나는데

한순간의 작렬했던 외침은

지금쯤 어느 골짜기를 흘러가고 있을까

오후 여섯시, 햇살이 서서히 자리를 뜨는 시간

부전나비 한 마리

누구 상인가 하고 잠시 기웃거리며 떠나가고

이제 곧 가을이 깊어지리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숲을 끌고 가는 개미들의 행렬

숲은 가랑잎처럼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