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박종해 시인의 대표작_山頂에서 외 4편

갑자기여인 2020. 3. 9. 17:05

 

山頂에서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너희들을 위해 돌아갈 수 있겠느냐

아는 것도 힘도 없이 참으로 막막하구나

호주머니 속엔 몇 개의

동전만 딸랑거릴 뿐

굴뚝마다 연기는 피어오르고

고달픈 허리띠처럼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간다

평화와 자유 그를 위해 한 방울의 피도 흘린 바 없이

내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너희들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

 

                                                                                       ↓2020.3 탄천에서 갑자기 촬영

 

멸치인생

아내는 멸치를 다듬는다

머리통을 떼고, 내장을 발가내고

꼬리를 잘라내어 매끈하게 다듬는다

 

넓고 푸른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놀던

요 조그마한 것들이

이제 박제된 몸으로 광주리 안에 담겨 있다

 

푸른 물결의 집에서

무수히 떼를 지어 버들잎처럼 물사래치던

아침 이슬 같은 하잘것없는 것들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속에서

은비늘을 반짝이며

온몸으로 길길이 뛰던 풀꽃 같은 생명들

 

나는 한 움큼 고것들을 손아귀에 쥐고

한 마리씩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한 줌 바다가 뱃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팔다리를 유연하게 흔들며

한 마리 작은 멸치처럼

세상 바다를 헤엄쳐 나간다

언젠가는 멸치같이 끝내고 말 운명을

신의 손에 맡긴 채.

 

 

 

이슬의 생애

나는 온몸으로 세상을 본다.

몸 전체가 하나의 눈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모두 잠든 밤에도

나는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세상을 본다.

 

이렇게 작은 풀잎 위에 집을 짓고

하룻밤을 천 년 세월처럼 지내다가

신의 말씀으로 빚은 해오름이 되면

나는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겨우 한 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풀잎의 집에서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렇게 간단한 삶의 한때를

천 년을 살다 갈 듯이 서로 상처 주며

고통과 고뇌를 내 몸속에 새기며 살아오다니.

 

 

 

 

 

수묵화 속에 들어앉아

강은 강끼리 어울려 웅얼웅얼 이야기하며

질펀하게 흘러가는데

소나무, 소나무는 저희들끼리 손을 잡고

무덤덤하게 서 있다.

새는 새끼리 허공에 길을 내며 날아오르고

나는 나 혼자 강 언덕에 앉아 있다.

 

붓 한 자루 들고

재 넘어가는 구름을 붙들어 놓고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도 붙들어 놓고

나는 고요의 그물을 둘러친다

조바심 내지 않고 넉넉하게

시간의 뒷덜미를 잡아서 소나무 가지에 묶어 둔다

모든 갈등이 고요 속에 빨려들어

소나무 널따란 오지랖이 느긋해진다.

 

 

 

빈병

나는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바람의 노래를 부른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때

일어서서 오만했던 자신을 돌아본다

 

용서해 다오, 그러나 내 주위엔 아무도 없다

다시는 차오를 수 없는 빈 몸의 흐느낌

그것이 바람의 노래다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바람의 노래를 부른다.

 

                                         -《月刊文學》613 2020년3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