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좋은 수필< 이기주_바람도 둥지의 재료 외1편

갑자기여인 2021. 7. 26. 21:14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 중에서

 

 

바람도 둥지의 재료

 

 

흐린 가을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꼭꼭 눌러 담아 하늘에 편지를 쓰고 싶은 그런 알이었다.

   운전 중에 신호를 기다리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짓는 모습을 보았다.녀석은 제 몸길이보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쉴 새 없이 운반하며 얼키설키 보급자리를 엮고 있었다. 기특해 보였다. 차를 멈추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휙 하고 한 자락 바람이 불었다. 미루나무가 여러 갈래로 흔들리자, 녀석이 애써 쌓아 올린 나뭇가지에서 서너 개 가지가 떨어져 나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궁금했다. 녀석은 왜 하필 이런 날 집을 짓는 걸까, 날씨도 좋지 않은데 ···.

 

   집에 돌아와 조류 관련 서적을 뒤적였다. 일부 조류는 비바람이 부는 날을 일부러 골라 둥지를 짓는다고 했다. 바보 같아서가 아니다.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튼실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내가 목격한 새도 그러한 연유로 흐린 하늘을 가르며 날갯짓을 한 게 아닌가 싶다. 나뭇가지와 돌멩이뿐만 아니라 비와 바람을 둥지의 재료로 삼아가며.

 

 

 

틈 그리고 튼튼함

 

 

대학 때 농활 농촌봉사활동 을 갔다가 작은 사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에 석탑 하나가 기품을 뽐내며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난 탑 주변을 빙빙 돌며, 돌에 새겨진 상처와 흔적을 살폈다. 얼핏 봐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석탑이었다. 세월과 비바람을 견딘 흔적이 역력했다.

  ‘몇 살쯤 됐을까?’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혼자 조용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찰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얼마나 됐을 것 같나?”

  주지 스님인 듯했다. 그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마주치는 옆집 아이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 듯 편안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석물石物은 수백 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야, 참 이런 탑을 만들 땐 묘한 틈을 줘야 해

  “? 틈이라고 하셨나요?”

  “그래, 탑이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앉아, 어디 탑만 그렇겠나.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한 법이지···

 

  스님이 들려준 설명이 건축학적으로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동안 내 삶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감정과 관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완벽을 기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만든 대상이 셀 수 없이 많았던 것 같다.

  틈은 중요하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다만 틈을 만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