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이어령 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_네 생각 외 1편

갑자기여인 2022. 3. 19. 23:44

 

네 생각

 

눈 부비며 일어나

칫솔짓을 하다가

신발을 신으며

고개를 들다가

창밖을 보다가

말을 하다가

웃다가

기침을 하다가

 

네 생각이 난다

해일처럼 밀려온다

그 높은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

나는

운다.

 

 

네 머리에 나비가 앉으면 리본이 되지

 

방 안에 피어 있는 꽃병의 꽃

정말 예쁘고 탐스러운데

왜 나비가 날아오지 않는 거지?

유리창을 닫아서

나비가 오지 못하는가보다

 

창문을 열어도

나비는 오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한 마리 나비도 오지 않는다

 

그래그래, 아파트가 너무 높아서 그럴 거야

나비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으니까

혼자 날아서 1층 위로 2층 위로 3층 위로

나비는 높이 날아야 하는데

그만 지쳐버렸나봐

방 안이 아니라 언젠가 흙 위에 꽃밭을 만들자

아빠는 땅을 파고 엄마는 꽃을 심고 너는 물을 줘야지

꽃들이 피면 냇물을 건너서 들판을 넘어서

정말 나비가 날아올 거야

 

유리창 때문에 오지 못한 나비가

바람 때문에 높이 날지 못한 나비가

엘리베이터를 탈 줄 모르던 나비가

날아올 거야. 네가 물을 준 꽃을 찾아서

 

그리고 네가 꽃인 줄 알고

너의 머리 위에 와서 앉을 거야

노랑 리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