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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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고 싶은 날관객과 배우 2023. 6. 18. 23:03
문선생에게 무작정 집을 나서고 싶어지는 때,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사건사고도 있었지만. 나를 수목원으로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우 흐린 날씨에 소나기도 맞고 소나기 피하러 처진올벚나무 둥치 안에서 사진도 찍고 따뜻한 문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내 가슴을 뭉쿨하게 하던 지 내편이 없다고 투정하던 늙은이에게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될 줄은 미쳐 몰랐다우 5월의 싱그러운 숲 속에서 가막살나무꽃, 이나무, 참빗살나무, 처진올벚나무, 무늬백합나무꽃 등 새로운 식물들을 보면서 새로운 친구를 갖게 되어 흥미롭고 즐거웠다우 행복이란 꽃말을 가진 크로바 꽃반지를 만들어 내 손에 끼워준 문선생은 십여년 전에 이어진 인연으로 다시 또 만나고 싶은 한 사람, 바로 행복이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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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여름 가고 여름_디엥 고원 외 2편관객과 배우 2023. 6. 15. 15:54
《여름 가고 여름》 채인숙 시집, 민음사 채인숙 1971년 경남 통영군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사에 「1945년, 그리운 바타비야」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디엥 고원 」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 가장 단순한 기도를 바치기 위해 맨발의 여자들이 회색의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른다 한 여자가 산꼭대기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태양이 한 개씩 태어난다 무릎이 없는 영혼들이 사라진 사원 옆에서 에델바이스로 핀다 몇 생을 거쳐 기척도 없이 피어난다 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며 천 년을 끓어오르는 화산 속으로 여자들이 꽃을 던진다 어둠의 고원을 거니는 만삭의 바람이 여자들의 맨발을 어루만진다 똑같은 계절이 오고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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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걸려 있고 싶다수필은 시도다 2023. 6. 8. 16:03
"...... 땀 흘리며 두들겨 하나씩 만들어 낸 꼬부랑 호미가 되어 소나무 자루에서 송진을 흘리면서 대장간 벽에 걸리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온통 부끄러워지고 직지사 해우소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똥덩이 처럼 느껴질 때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문득 어딘가에 걸려 있고 싶다." 시인 김광규의 「대장간의 유혹」이란 시 한 부분입니다. 며칠 전 산책길에서 밤나무에 걸려 있는 빗자루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낙엽을 쓸어 모으던 싸리비, 흙을 쓸던 플라스틱 빗자루가 녹음 우거진 숲 속 밤나무에 걸려 있는 모습은 편하고 즐겁고 자유스러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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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지상에서의 며칠관객과 배우 2023. 6. 4. 23:46
지상에서의 며칠 /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줌이었다가 바람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 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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