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785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류시화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류시화 오늘 나는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이 달개비, 허락 없이 생각의 경계를 넘어와 지난해 두세 포기였는데 올해 마당 한 귀퉁이를 다 차지했다 뽑아서 아무 데나 던져도 흙 근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 한해살이풀의 복원력 단순히 죽음과 소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연약한 풀이 가진 세상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나를 긍정론자이게 만든다 물결 모양으로 퍼져 가는 유연함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 빛을 찾아 나가는 본능적 지성 다른 꽃들에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그 자신은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장미가 이 닭의장풀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의 눈에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도 달개비의 여윈 손목을..

관객과 배우 2023.03.17

정호승 시인의 <마지막 기도>를

정호승 파르르 분노에 떨며 주먹이 칼이 되던 모든 순간은 꽃이 되기를 절망의 벽을 내리치며 벽과 함께 와르르 무너져 내려 잠 못 이루던 순간은 모두 바람이 되기를 시궁창 바닥 같은 내 혀끝에 고여 있던 모든 증오와 보복의 말들은 함박눈이 되기를 의상대 소나무 가지 끝에 앉아 눈을 맞으며 동해를 바라보던 작은 새처럼 인내는 웅크린 눈송이가 되어 흙의 가장 깊은 뿌리에 가 닿기를 창밖에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커피 물 끓이는 동안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봄이 오지 않아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용서에도 붉은 진달래가 피어나기를 S에게, 우리는 한 단체에서 오랫동안 지내고 있죠. 오늘 쌓여 있던 묵은 마음을 털어 내면서 후회와 반성을 했습니다.크든작든 어느 곳에서나 생기는 다툼과 분열, 그 것들이 세월을 많이 ..

관객과 배우 2023.03.08

봄까치꽃의 첫손님

"사람들은 걸으며 서서 봄을 맞이하려 한다. 키가 크고 화려한 꽃나무로 봄을 느끼려한다. 지위와 명예, 부를 쫒아다니는 현실보다는 봄까치꽃처럼 눈에 잘 띄지 않고 바닥에 붙어 있는 낮은 현실도 있다. 올려다봐야만 하는 키 큰 나무보다 허리를 굽혀야만 만날 수 있는 풀꽃들도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가르쳐준다. 봄까치꽃 따라 작은 꿈과 희망에 사랑을 보낸다 들꽃은 계속 피어날 것이고 까치들은 계속 반가운 소식을 몰고 올 것이다"

관객과 배우 2023.02.28

이어령/기도는 접속이다

이어령 시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기도는 접속이다」 친구와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컴퓨터나 호주머니 스마트폰으로 접속합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 그가 있어도 들리지 않는 곳에 그녀가 있어도 나는 접속할 수 있습니다 그와 그녀의 아이디만 알면 기도를 드릴 때에는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읍니다 자판을 건드리는 엄지손이 아닙니다 아이디는 주 예수, 암호는 할렐루야와 아멘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그 빛과 소리는 내 가슴의 패널 위에 떠오릅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혹은 터치 스크린을 애무하듯 손끝으로 건드립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친구를 만나듯 이제 두 손 모으면 성령의 공간으로 접속할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아주 가까이 오늘 나는 기도를 ..

관객과 배우 2023.02.26

봄소식 전령사 봄까치꽃

". . . . . 아스피린 크기랄까, 동전 100원짜리 숫자 0 크기랄까 아니면 와이셔츠 단추의 반의 반 크기로 앙증맞다. 작으면서도 꽃술과 꽃잎, 꽃받침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실 같이 가는 줄기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솜털이 있고 밑동에서 갈라져 누은 듯 퍼져 있다. 꽃받침은 흰 무명천에 하늘색 물감을 쏟아놓은 것 같고 속에는 진 푸른 줄무늬가 고양이 수염 같이 그려 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잘 핀다. 어리숭하면서 정이 넘치고 약은 듯하며 순진함이 보인다 가마솥 뚜껑을 닮아 숭늉의 맛도 나는 듯 하다 이름은 큰 개불알꽃, 열매가 달린 모습이 개의 음낭을 닮아서 붙은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번역해서 그렇게 부른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봄소식을 제일 먼저 빨리 전한다하여 봄까치꽃이라 고..

관객과 배우 2023.02.14

택배_정호승

택배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 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정호승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관객과 배우 2023.02.11

다육이 자보 꽃이 피고 질 때

다육이 자보(백합과 Gasteria 속, 원산지는 남아프리카 남부) 화분 1개를 2021년 7월 15일에 조카로 부터 선물 받았습니다 선물로 받은 자보는 아롱아롱한 무늬가 고르게 있으면서 무심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기는 별로 크지 않은 데 화분의 높이가 높아서 발런스가 맞지 않은 듯 보였지만 그냥저냥 다른 화분들과 함께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조카는 자보를 키운 경험이 있어, 키가 큰 화분을 선택하였더라고요 자보는 시간이 흘러도 무심한 표정으로 곁에 번식만 하더니 18개월이 지난 2023년 1월13일에 제일 큰 잎 사이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곡선으로 꽃대가 길게 자라며 산호색과 연두색 그리고 미색의 꽃봉오리가 망울망울 맺히기 시작하였습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던 꽃봉오리들이..

관객과 배우 2023.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