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782

나서고 싶은 날

문선생에게 무작정 집을 나서고 싶어지는 때,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사건사고도 있었지만. 나를 수목원으로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우 흐린 날씨에 소나기도 맞고 소나기 피하러 처진올벚나무 둥치 안에서 사진도 찍고 따뜻한 문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내 가슴을 뭉쿨하게 하던 지 내편이 없다고 투정하던 늙은이에게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될 줄은 미쳐 몰랐다우 5월의 싱그러운 숲 속에서 가막살나무꽃, 이나무, 참빗살나무, 처진올벚나무, 무늬백합나무꽃 등 새로운 식물들을 보면서 새로운 친구를 갖게 되어 흥미롭고 즐거웠다우 행복이란 꽃말을 가진 크로바 꽃반지를 만들어 내 손에 끼워준 문선생은 십여년 전에 이어진 인연으로 다시 또 만나고 싶은 한 사람, 바로 행복이라우.

관객과 배우 2023.06.18

채인숙/여름 가고 여름_디엥 고원 외 2편

《여름 가고 여름》 채인숙 시집, 민음사 채인숙 1971년 경남 통영군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사에 「1945년, 그리운 바타비야」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디엥 고원 」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 가장 단순한 기도를 바치기 위해 맨발의 여자들이 회색의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른다 한 여자가 산꼭대기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태양이 한 개씩 태어난다 무릎이 없는 영혼들이 사라진 사원 옆에서 에델바이스로 핀다 몇 생을 거쳐 기척도 없이 피어난다 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며 천 년을 끓어오르는 화산 속으로 여자들이 꽃을 던진다 어둠의 고원을 거니는 만삭의 바람이 여자들의 맨발을 어루만진다 똑같은 계절이 오고 또 ..

관객과 배우 2023.06.15

나태주/지상에서의 며칠

지상에서의 며칠 /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줌이었다가 바람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 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관객과 배우 2023.06.04

들길을 걸으며/나태주

들길을 걸으며/나태주 1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 건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나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빛나는 세상이 됩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따뜻한 세상이 됩니다. 2 어제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어제 내 발에 밟힌 풀이 오늘 새롭게 일어나 바람에 떨고 있는 걸 나는 봅니다 나도 당신 발에 밟히면서 새로워지는 풀잎이면 합니다 당신 앞에 여리게 떠는 풀잎이면 합니다.

관객과 배우 2023.04.19

벚꽃은 길을 걷는다

아랫그림은 탄천과 동막천이 만나는 삼각주에 놓인 구미교 위에서 찍은 그림입니다. 벚꽃은 기쁜 마음으로 노래 부르며 길을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돌다리 위도 건너 가고 건너 오면서 가볍게 춤을 추며. 저도 구미교 위에서 자동차 길을 건너 가서 다시 건너 오며 화려한 풍경을 파노라마로 찍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동창들은 벚꽃여행을 떠났어요.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많이 부러웠지요. ㅋㅋ 여기 분낭 구미교 위에서 이쪽 저쪽으로 보이는 벚꽃 풍경은 대단히 화려하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경치입니다 "벚꽃놀이 여기로 오세요", 모든 게 무료입니다

관객과 배우 2023.04.05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류시화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류시화 오늘 나는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이 달개비, 허락 없이 생각의 경계를 넘어와 지난해 두세 포기였는데 올해 마당 한 귀퉁이를 다 차지했다 뽑아서 아무 데나 던져도 흙 근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 한해살이풀의 복원력 단순히 죽음과 소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연약한 풀이 가진 세상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나를 긍정론자이게 만든다 물결 모양으로 퍼져 가는 유연함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 빛을 찾아 나가는 본능적 지성 다른 꽃들에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그 자신은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장미가 이 닭의장풀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의 눈에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도 달개비의 여윈 손목을..

관객과 배우 202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