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설해목/정호승

갑자기여인 2014. 7. 12. 23:01

설해목/정호승

 

천년 바람 사이로

고요히

폭설이 내릴 때

내가 폭설을 너무 힘껏 껴안아

내 팔이 뚝뚝 부러졌을 뿐

부러져도 그대로 아름다울 뿐

아직

단 한번도 폭설에게

상처받은 적 없다

 

어느 벽보판 앞에서

 

어느 벽보판 앞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쳐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 버린 죄

                                     정호승 시집 『밥값』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