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스크랩] 손자/이원화(한결문학회)

갑자기여인 2014. 10. 8. 20:24

                                           손자

 

                                                                                                        이원화

 

   여름은 풍성하다.

   인간의 삶도 풍성풍성하면 좋겠다. 풍요함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사랑하게 만든다. 늘 비어 있던 아파트도 손자가 오니 풍성함이 넘쳤다. 여름 끝자락에 마음에 걸어 두었던 플래카드를 떼어냈다.

 

   외국에 있는 손자가 두 달을 머물다 갔다. 어린 손자를 위해 시간밥 짓는 것은 즐거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침저녁으로 무슨 반찬을 준비해야할 지 고민이 생겼다. 생활습관이랄까 문화적 차이랄까 아무튼 단출히 살던 패턴은 사라졌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 손자를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수도 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옷은 속옷부터 겉옷까지 매일 두 차래씩 갈아입는다. 어제 입었던 반바지를 한 번 더 입으라 했더니 매일 만나는 친구에게 같은 옷 입은 것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한다. 멀쩡한 운동화 뒤꿈치는 아예 꺾어 신고 다닌다. 그런 것 정도는 이해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무슨 말이나 일에 대해서 우선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번만 반복해서 말을 해도 벌써 잔소리한다는 표정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사춘기 소년임에 틀림없다. 대문짝에 '개 조심'이라고 크게 써 붙였는데 요즘은 '중2 조심'이라 써 붙인단다. 사춘기의 이유 없는 반항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해만 할 지 모르겠다. 한참 크는 시기에 반듯하게 변하고 성장하면 좋겠다.

 

   먹고 입는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의 사춘기는 헌책을 빌려다가 밤새 읽고 또 읽고, 빨리 전등불 끄라는 어른들 성화에 화장실에서 읽었던 추억도 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작품을 몇 번씩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던 추억도 있다. 사춘기는 정상적인 성장과정으로 누구나 겪는 하나의 통과의례이다. 그 과정에 지나친 관심이나 염려는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다. 부모는 그의 감정기폭이 심할수록 거기에 맞는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은 살아가는데 꼭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 그 기본과 본분을 가르쳐야한다.

 

   한 달쯤 지나니 녀석은 부드러워지고 잘 따라와 준다. 어느 날 녀석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낯선 환경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루 종일 여러 가지를 공부하니 말이다.

   이번 여름은 몸은 고달팠지만 손자와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맛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귀한 것을 가지게 되었다. 녀석은 걱정하지 않아도 이미 자신의 생활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손자를 보며 자신을 돌아보고, 손자와 이야기하며 미래를 보았다.

   조선 유학의 큰 스승 퇴계 이 황(1501~1570) 선생이 지은 '훈몽(訓蒙)'이란 시에서 자녀교육은 "많이 가르치는 것은 싹을 뽑아 북돋움과 매한가지/ 큰 칭찬이 회초리보다 오히려 낫네. /자식한테 우매하다 말하지 말고/차라리 좋은 낯빛을 보이게나." 라고 하였다. 많이 가르치려는 것은 곡식을 빨리 자라게 하려고 싹을 쑥 뽑아 올리는 것과 같아, 그냥 놔두면 잘 자랄 가능성을 없앤다고 하였다.

   『맹자』도 '아들은 바꾸어 가르쳐야 한다.(易子而敎之)'고 하였다.

같은 시각에 태어난 쌍둥이도 첫째와 둘째의 세대차가 난다고 한다. 조부모가 손자를 교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 살고 잘 먹고 글로벌 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느라 기본적인 것을 놓쳐버리고 있었다. 지금 나타나는 사건들을 보면 기본적인 것을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긴 것이다. 풍성한 여름에 매달았던 '중2 조심'이란 플래카드가 벌써 그리워진다.

출처 : 한결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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