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시도다

산당화의 추억_황동규

갑자기여인 2019. 4. 26. 00:18

 

 

문학과지성 시인선238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황동규 시집

 

 

         

         산당화의 추억/황동규

 

1

생(生)의 나중 반절을 부안반도 남쪽 입구에 숨어 산

반계 유형원의 글쓰던 집을 찾아

골목길 입구에서 쥬스 한 캔 사 마시고

사슴 두 마리 물끄러미 서 있는 조그만 농장을 돌아

산길 오르기 직전

이리저리 이름 모를 새 소리 찾는 눈에

피어 있던 한 무리 산당화

알맞은 키의 조그맣고 바알간 불씨들 너무 예뻐

손등을 가시에 긁히며

하나씩 가운데 노란 꽃술까지 하나씩

만져본다

 

 

 

2

추억은 인간을 사람으로 만든다

큰 바위가 나타나고

길이 가팔라지며 숨이 가뿔 때

바위 앞에 발 앞에

진초록빛 끈 하나가 움직일 때

마음속에 켜 있던 저 불씨들

초록 독뱀 놀라고 곧 초록빛 호기심이 되는

질겁하는 손과 만져보고 싶은 손이

한 손애서 일순 만나 손을 완성하는

손이 점차 투명해지는

'사람'의 설렘

 

3

아무도 없다

마당 옆 납작한 돌 쌓은 우물엔

이끼 파랗고

왼편 방마루를 한 단 높여 난간 두른

간편한 누마루

조용히 앉아

간편하게 손으로 어루만져본다.

아까 울던 새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울고

손에 나무의 무늬가 묻어난다

무늬가 살아 있었구나

한 때 숨쉬며 설레고 꿈꾸던

나무들의 환희 고통 추억이.

 

 

 

4

반계의 집에서 반계를 잊고 내려온다

아까 뱀 만난 자리에 오니

바로 길 옆에 불켜놓고 서 있는 산당화들

왜 좀 전엔 못 보았을까

전처럼 손을 내미니

이번엔 가시들이 '손대지 말아요!'

(나도 아무나 만지는 것이 싫었어, 자신도 모르게 내 가슴을 훑은 자들!)

공중에서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

가슴을 쓸어본다

과거 손 못 대본 모든 것의 추억들이 설렌다

그 설렘들

사람이 설레는 순간을 그 누가 간단히 잡을 수 있으랴?

몸 속을 눈감고 달리는 저 무량(無量)의 피

먹구름 속에서 울리지 않고 거푸 치는 징

저 깊이 잴 수 없는 보랏빛 속 반디들의 흩날림

그 순간 하나를 저장하려면

용량 1기가바이트도 부족하리

두 손을 차례로 들여다본다.

손이 점차 투명해지고

반디들이 여기저기 뜨고

저 환한 시간의 멈춤!

 

(↑탄천의 돌다리 건너 층계를 오르면 산당화가 고음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