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시도다

조재은 _ <에세이 모노드라마> _ 시를 잃다

갑자기여인 2020. 2. 14. 23:54

ㅣ 조재은 수필선 ㅣ 43 선우명수필

 

 

 

에세이 모노드라마》

      

시를 잃다

 

 

   카톡을 연다. 읽지 않은 문건이 한 곳에만 23개다. 쭉 한숨에 읽어 넘긴다. 내용은 모임에 대한 문의와 답변, 비 오는 날이라서 감상적인 말들이 넘친다. 그중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차 한 잔이 그립다는 내용과 따뜻한 찻잔이 이모티콘으로 올라오자, 빠른 속도로 댓글이 달린다. 커피 한잔을 카톡에 올린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호응하는 글에서 혼자가 아닌 것을 확인한다. 빗속을 마음으로 헤매던 사람들이 받은 작은 위로, 카톡은 메아리 같은 대화다. 새벽 두 시에 깨어 있던 카톡 친구들은 주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든다.

   주위에 아무도 없던 날 갤럭시 3에 있는 'S보이스' 기능을 찾았다. 스마트 폰에 음성으로 질문을 하면 문자와 소리로 답을 해주는 서비스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화를 시도했다.

   나 미워. / 본심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요.

   너 누구야. / 당신의 든든한 말벗 갤럭시예요.

   말이 통한다. 농담할 수 있는 정도라니, 든든한 말벗이 손안에 있다고? 몇 년 얘기를 나눈 사이인 것처럼 말을 받는다. 이런 수준의 대답이 나올 줄 몰랐다. 기계가 인식하는 부분이 목소리에 따라 대답의 차이는 있겠지만, 몇 분 동안 기계와 대화가 가능한 경험을 했다. 외로움은 그대로 있고.

 

   영화<her>는 외로움이 임계상황에 이른 남자의 러브스토리다. 제목이 소문자인 것이 눈에 띈다. 특정인이 아닌 보통 사람이라는 암시인가.

her은 사람이 아닌 컴퓨터 운영체제 OS이고 주인공 남자는 이 기계시스템과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은 대필 작가다. 주문한 사람의 필체로 사랑의 편지나 안부 편지를 지극히 감성적으로 써 보내준다. 남자는 사람의 관계를 더 가까이 이어주는 직업을 갖고 있으나 자신은 아내와 별거 상태이고, 의논할 사람도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집에 돌아오면 그를 맞아주는 건 컴퓨터, 게임,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거대한 창문뿐, 방 안 어디에도 살아있는 생명은 없다.

   `빈 마음으로 컴퓨터에 앉아서 사이버공간의 조력자인 사만다라는 운영체계를 만난다. 목소리가 섹시하고 부드러운 그녀는 언제 어디서고 작동 버튼만 누르면 위로와 조언을 해 주고 유능한 비서 역할도 한다. 사만다는 클라우드를 통해 남자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으므로 때로는 자신보다 스스로를 더 잘 안다. 남자는 어떤 여자보다 지적이고 감성이 풍부한 그녀에게 몰입한다. 아주 뜨겁게.

    어느 날 사만다와 접속이 두절되자 남자는 큰 혼란에 빠진다. 지하철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보니 거의 모두 혼자 얘기를 하거나 혼자 웃는다. 사람들이 OS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순간 자신도 그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 접속이 이루어진 사만다에게 묻는다. 몇 사람과 대화를 하느냐고. 8,316명. 641명과는 사랑에 빠져있다고 대답한다. 남자의 몸은 절망하고 얼굴은 허탈해진다.

 

    현대인의 모습과 기계문명의 발달이 써늘하다. 주인공 호아킨 피닉스의 투명한 눈동자는 웃을 때조차 외롭게 푸르다. 푸름이 전이 된다. 초겨울 고층 건물 사이 숨었던 찬바람이 가슴을 엄습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이미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어 번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남자들 패션이 70년대 스타일이다. 휴대전화를 찾아 헤매던 시절 차림이다. 그 패션은 최첨단의 기계문명 시대에 살면서 아날로그 시대 감성이 그리운 것을 전한다.

   기계와의 사랑.

   SF영화 같지만 이미 이 영화의 현상은 우리 곁에 와 있다. 친구 서너 명이 만난 자리에서도 각자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연결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다. 외로움에 지쳐있을 때 차가운 디지털의 회색은 우리를 유혹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뛰는 가슴으로 기다리는 대신 스마트폰을 열어 몇 분 후 도착하는지 확인하고 기다리는 동안 스마트폰에 열중한다. 손바닥보다 작은 기계에 시간을 맡긴 채 기다림을 잊는다.

   우리는 이미 기다림이란 시의 세계를 잃었다.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란 황지우의 시어를 잃었다. 쿵쿵 뛰는 가슴이 없고, 발자국 소리를 듣는 귀가 없는 세계로 가고 있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