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소유언시_황동규

갑자기여인 2020. 10. 2. 22:06

소유언시(小遺言詩)_황동규

 

                            열반에 머문다는 것은 열반에 속박되는 것이다.ㅡ원효

 

1.

살기 점점 더 덤덤해지면,

부음(訃音)이 겹으로 몰려올 때

잠들 때쯤 죽은 자들의 삶이 떠오르고

그들이 좀 무례하게 앞서갔구나 싶어지면,

관광객도 나대지 않는 서산 가로림 만(灣)쯤에 가서

썰물 때 곰섬(熊島)에 건너가

살가운 비린내

평상 위에 생선들이 누워 쉬고 있는 집들을 지나

섬 끝에 신발 벗어놓고

갯벌에 들어

무릎까지 뻘이 차와도

아무도 눈 주지 않는 섬 한구석에 잊힌 듯 꽂혀 있다가

물때 놓치고 세상에 나오지 못하듯이.

 

2.

그냥 가기 뭣하면

중간에 안국사지(安國寺址)쯤에 들러

크고 못생긴 보물 고려 불상과 탑을 건성 보고

화사하게 핀 나무백일홍들

그 뒤에 편안히 누워 있는 거대한 자연석(自然石) 남근을 만나

생전 알고 싶던 얘기나 하나 묻고

대답은 못 듣고                                                      

 

3.

길 잃고 휘 둘러가는 길 즐기기

때로 새 길 들어가 길 잃고 헤매기

어쩌다 500년 넘은 느티도 만나고

개심사의 키 너무 커 일부러 허리 구부린 기둥들도 만나리

처음 만나 서로 어색한 새들도 있으리

혹시 못 만나면 어떤가

우리는 너무 많은 인간

나무, 집과 새들을 만났다

이제 그들 없이 헤맬 곳을 찾아서

 

 

4.

아 언덕이 하나 없어졌다

십 년 전 이 곳을 헤매고 다닐 때

길 양편에 서서 다정하게 얘기 주고받던 언덕

서로 반쯤 깨진 바위 얼굴을 돌리기도 했지

없어진 쪽이 상대에게 고개를 약간 더 기울였던가

그 자리엔 크레인 한 대가 고개를 휘젓고 있다

문명은 어딘가 뻔뻔스러운 데가 있다

남은 언덕이 자기끼리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을까

지난날의 갖은 얘기 이젠 단색(單色) 모놀로그?

 

5.

한뼘 채 못되는 시간이 남아 있다면

대호 방조제까지만이라도 갔다 오자.

언젠가 직선으로 변한 바다에

배들이 어리둥절하여

공연히 옆을 보며 몸짓 사리는 것을 보고 오자

나이 늘며 삶이 점점 직선으로 바뀐다

지난 일들이 빤히 건너다보이고.

 

6

곰섬 건너기 직전

물이 차차 무거워지며 다른 칸들로 쫓겨다니다

드디어 소금이 되는 염전이 있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든 억지로든

칸 옮겨다님

누군가 되돌아가지 못하게 제때마다 물꼬를 막는다

자세히 보면

시간에도 칸들이 쳐 있다

마지막 칸이 허옇다

 

7

물떼샌가 도요샌가

긴 발로,

뻘에 무릎까지 인간은

생물로 치지 않는다는 듯이

팔 길이 갓 벗어난 곳에서 갯벌을 뒤지고 있다

바지락 하난가 잡혀 나온다

다 저녁때

바지락들만

살다 들키는 곳

 

 

 

8

어둠이 온다

달이 떠오르지 않아도

물 소리가 바다가 된다

밤새가 울 만큼 울다 만다

왜 인간은 살 만큼 살다 말려 않는가?

생선들 누웠던 평상 위

흥건한 소리마당 같은 비릿함

그 냄새가 바로 우리가 처음 삶에,

삶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 자리!

그 냄새 속에 온몸 삭듯 젖어

 

육십 년 익힌 삶의 뽄새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이 멈출 길 없는 떠남, 또 새 설렘!

내 안에서 좀체 말 이루려 않는

한 노엽고, 슬거운 사람을 지나친다

곰처럼 주먹으로 가슴 두들기고

밤새처럼,

울고 싶다.

                            _황동규 시집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