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석 시인 _잡초는 낫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 2편
이 시대 창작의 산실 ㅣ 이광석 시인 ㅣ 대표작
《月刊文學》622 2020년12월
잡초는 낫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잡초 앞에서
너는 언제나 태풍주의보가 내려진 막막한 바다였다
낫을 들면 성난 파도가 내 키를 넘어 발목까지 칙칙 감아 당겼다
무성한 잡초의 바다에 떠다니는 작은 뗏목 같은, 무기력한 낫 한 자루
차라리 너와 나 사이에 화해의 작은 섬 하나 만들고 싶었다
베어도 베어도 쓰러지지 않는 곧고 바른 당당한 是非 하나 키우고 싶었다
낫을 두료워하지 않는 잡초들 자존심 바다보다 깊다
고사목
지리산에는 주민등록증이 없는 나무들의 마을이 있습니다 성씨도 나이도 모르는 고사목들이 모여 삽니다 봄이 와도 새순 하나 못 틔우고 계절이 바뀌어도 새 한 마리 앉지 않는 불임의 세월과도 시비 하나 없이 편안히 살아갑니다 천왕봉 달빛 잠시 쉬어 가는 외로운 의자 같은 나무, 칠선 계곡 깊은 적막 예까지 밀고 와 노고단 하산길 재촉하는 늙은 할아버지들 땀방울 소리 없이 빛납니다 뿌리 내려 살아온 백 년, 벌거숭이로 살아갈 또 다른 백년을 예약하는 천 년 푸른 저 고사목들의 울음을 보라 발신인도 없는 우표를 마디마디 가지마다 잔뜩 매달고 장터목 칼바람 혼자 받아 봄편지 택배 길 멈춘 저 늙은 집배원. 아, 텅 빈 하늘로 눈 먼 세월 다 보내고 이제는 입고 벗고를 초웧한 탁발승이 되었네
바람의 기억
하루 종일 산에서 사는 바람을 보았다
한 생애를 바다에서만 거주하는바람도 만났다
계곡 속 햇살과 물장구치는 놈
생각 깊은 겨울나무들 잔걱정 흔드는 놈
사람들 기척 소리도 멀리하면서
산문에 기대 사는 탁발승과도 인사를 나눴다
모처럼 겨울 바다에 나왔다
세상의 온갖 바람들이 발목 잡힌 곳 여태껏 노숙할 자리 한 편 마련 못한
저문 바다 옛바람들이 가버린 기억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이제 겨우 커피 한잔의 여유와 마주하면서도
60대의 낡은 풍경화 같은 고집 하나로
모두가 떠난 그 빈 부두에 갯벌처럼 흔들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친 8부 능선
혼자서 가고 있는 그의 산행일지를 훔쳐보았다
이광석_1959년 현대문학 추천 <겨울나무들> 외 10권 경남언론문화원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