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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文學> 신인상 당선수필 '가을 한 잔'관객과 배우 2010. 11. 19. 20:48
이원화는 격월간지『좋은 文學』수필부문에 신인상으로 뽑혔다.
좋은 문학 통권 54호_11/12월에 게재된 작품 <가을 한 잔>을 소개한다.
심사평
생명력을 지닌 이원화씨의 작품 '가을 한잔'을 당선작
으로 선정했다.
생명력을 지닌 작품은 인간 핏덩이에게 젖이 되고 피가
되어 신생아에서 인격을 지닌 자로 진화시키는 산파역을
해줄 수 있기에…….
'다도청향(茶道廳香)'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찻잔 수집도
하면서 차 한 잔을 마셔도 계절을 음미하며 인생을 낙조
(落照) 할 줄 아는 작품인 것 같다.
' 가을을 통째로 한잔 속에 가득히 담아 마셔 보고 싶
다.' 라는 글귀를 읽으면서는 '통도 크시네요.' 라는 단어
가 저절로 입가에 번집니다.
하지만 글도 멋지고 삶도 멋스럽게 경영하는 분 같은 분
위기가 뜸뿍 담긴 매끄러운 작품입니다.
마지막 연에 '이제 손안에 잡고 싶고 품에 안고 싶은 참
가을바람이 가슴을 두드린다.' 는 감성과 표현 모두가 좋
구요. 이렇게 감칠맛 나게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 하는데 인색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신인상 수준 이상의 작품이기에 찬사를 겯들입니다.
심사위원 곽 민, 이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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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한 잔
"나 어떻게 하지" 머플러를 풀면서 정선씨가 당황해 한다. 초가을 길을
산책하려고 탄천변 정자에 먼저 와 기다리던 친구들이 물었다.
"왜요?"하였다. "지금 여기 오는데 택배 아저씨가 전화하였어요, 보령
에서 택배가 왔다고. 집에 사람이 있으니 두고 가라고 대답했지요. 조금
후에 또 전화가 왔어요, 화가 많이 난 목소리로 '냉장고 안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 냉동실엔 뭐가 이렇게 꽉 차 있느냐'고 남편이 소릴 쳤어요. 오
늘 집에 들어가면 큰 일이 날 것 같아요." 한다. 우리들은 한마디씩 했다.
'빨리 가서 정리하라', '냉장고 안이 다 그렇지 남자가 좀스럽게 냉장고
속까지 참견 하느냐', '얼마나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느냐'는 등,
그런데 몇 년 전에 혼자된 자칭 시인인 순희씨가 한 마디 거든다. "빨리
들어가 냉장고 정리하고, 남편에게 가을 차 한 잔 만들어 드려요." 조용히
초가을바람 불듯이 말한다. 무더위로 기승을 부리던 여름철도 한풀 꺾이
었다. 나뭇가지는 여름의 앉은 자세에서 무성한 잎들을 한잎 두잎씩 풀
고 있다. 날씨는 바삭바삭하고 청명하다
오래 전 부터 찻잔 수집을 좋아하여 백여 개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가
을이 되면 애용하는 '다도청향(茶道聽香)'이란 한자가 쓰여 있는 분청 찻잔
이 있다. 언제부턴가 갈 곳이 마땅찮고 우울할 때는 인사동 골목을 배회하
곤 하였다. 그러다가 마음에 붙고 정이 가는 물건을 값도 싸게 구입하면
마치 인사동 고가구집 주인이 된 양 기뻐하던 시절이 있다. 때깔이 예쁘
고 곱지도 않는 그 잔을 산 것은 잔에 쓰인 글자 때문이다. 예서체로 쓰인
'다도청향'의 의미는 차를 즐기는 것은 마음의 눈으로 그 색깔을 읽으며
향기는 귀로 들으며 맛은 몸으로 느끼라는 뜻이 아닐까싶다. 마음 깊게
울린다. 다포를 깔고 다구를 늘어놓으며 다관 속에서 팔팔 끓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차를 마시는 것은 삶의 멋진 운치가 아닐 수 없다.
비움의 조각으로 빚어진 다기를 좋아 한다. 늘 곁에 있어 떠날 줄 모르고
말없이 그 자리에 있다. 채워도 좋고 비워도 좋다. 차를 마시고 난 뒤의 빈
잔에는 추억의 비움이 있어 더 좋다. 찻잔이 비어 있을 때 빈 마음을 대해
편안한 마음이 들며 빈 공간에서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된다. 빈 곳이 하나
도 없으면 존재가 있을 자리가 없다. 비움은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치를
떠오르게 한다. 그 비움이 가져다주는 공간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운다.
고독이란 외로움의 공간으로 이루어진다. 그 공간이란 자신의 삶에서 속
된 생각을 버리기 위하여 필요하다.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마음의 여유와 긍정의 힘을 얻게 된다. 차 맛은 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차를 즐기는 사람의 마음빛깔로서 맛과 색과 향이 달라진다. 그래
서 청향적인 공간이 필요하며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채울 수 있
는 것이다.
가을빛 따라서 마음이 가득 채워지면 갇혀있는 찻잔들을 꺼내어 먼지를
닦고 쓰다듬어 주어야겠다. 그 찻잔에 얽혀 있는 추억을 꺼내어 하나씩 펼
쳐 여정을 기억해 줄 것이다. 좁아터진 장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찻
잔을 들여다보면 몇 개씩 포개어 있고 또 그 안에 작은 것을 말없이 품고
있다. 그것들은 짧지 않은 과거의 흔적으로 사랑, 여행, 이별, 친구, 조카,
인사동, 경주, 비밀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추운 겨
울이 오기 전에 저 찻잔 속에 얽혀 있는 나만이 아는 비밀의 역사를 찾아
순례자의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이제 손 안에 잡고 싶고 품에 안고 싶은 참 가을 바람이 가슴을 두드린다.
흔히들 가을에는 차 한 잔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나는 가을을 통째로 한
잔 속에 가득히 담아 마셔보고 싶다. 오장육부까지 숙연해지는 황홀함을
주는 이 가을을…….
당선 소감
어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는 각각 아름다운 예술이여야 하지 않을까? 그 예술은 삶 속에서 어떤 상황들의 목표 치수들을 가로 세로로 엮어 다양한 무늬를 수놓아 가는 거대하고 유니크한 한 폭의 양탄자 같은 존재일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는 요즘, 학생시절 전공했던 문학 동네를 떠나 다른 분야에서 젊음을 태우면서 각광과 박수갈채를 제법 받아보았는데도 작가로서의 등단 소식만큼은 또 다른 희열과 각오를 다지는 시간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좋은 문학>의 신인문학상 당선을 비롯해 잊을 수 없는 두세 가지가 부족한 저에게 고딕체의 나이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늘 긍정적인 관심과 칭찬 그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고 한 아름씩 사랑을 보내주셔서 그만 춤을 추고 말았습니다. 부끄럽고 어색한 마음 뿐, 그러나 앞으로 현실 속에서 현 실 너머에 있는 희망, 행복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수필이란 숲 속에서 하나의 나무가 되어 친구의 곁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가만가만 들려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가을 차 한 잔 올리며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