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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그해 가을관객과 배우 2020. 12. 12. 16:57
여기서 >좋은 수필< 이란 제가 좋아하는,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수필입니다.
요즘 우리 동네 콕하면서
'비우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책장에 쌓여 있는 책을 정리하면서 다시 읽고 싶은 글, 좋아하는 수필들을 떠나보내기 서운해
마지막으로 여기에 남깁니다.타자기 뚜벅이라 얼마만큼 남길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겨 불 작정입니다.
권정생 원작 ㅣ 유은실 글 ㅣ 김재홍 그림 《그해 가을》
나는 예배당 문간방에 산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다.겨울엔 귀가 동상에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한다 그래도 이 조그만 방은 가난하고 아픈 내가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다 이틀 글을 쓰고 나면 사흘째는 혼자 앓는다. 학교 길에 이따금 들르는 아이들 말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창섭이뿐이었다. 지체 장애와 지적 장애가 있는 열여섯 창섭이. 창섭이는 울 줄을 몰랐다. 아픈 것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창섭이와 내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걸. 부슬비 내리는 어느 가을날, 창섭이가 찾아왔다. 질퍽한 흙투성이 바지를 걷어 올리지도 않고 내 방문 앞에 와서 멈추어 섰다. 내가 열심히 무엇을 쓰고 있다고 여겼는지. 창섭이는 문 앞에 선 채 숨을 죽였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내가 들어오라고 말할 때까지. 말없이 글을 쓰고 있으니 기다리기 지루해진 창섭이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나는 그래도 계속 썼다. 창섭이는 어깨를 들먹거려 가면서 한숨을 쉬었다. 얼른 상대를 해 달라는 눈치였다. '말을 걸까?' 나는 망설이며 글을 썼다. ·"서새니도 냉가 시치?"* 순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창섭이의 얼굴, 그의 눈이 슬프게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말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선생님도 내가 싫으시죠?) 창섭이는 곧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내가 무슨 말을 걸어 줄 것을 기대하는 눈치었다. 목을 앞으로 내밀며 침을 꿀떡 삼켰다. "머 머구지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더워졌다. 단추 없는 옷자락 속으로 보이는 창섭이 배가 훌쭉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배가 고팠다. 먹을 것이 없었다. '찐 감자 몇 개만 있으면 맛나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 (* 뭘 먹고 싶다) "창섭아, 우리 누워서 자지 않을래?" 나는 창섭이 팔을 끌어다 방바닥에 눕혔다. 나도 누웠다. 내 여윈 팔에 창섭이 머리를 얹었다. 창섭이 옷에서 냄새가 났다. 배가 고파 잠이 오지 않았다. 창섭이는 누워서도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찬송가 부를까?" 창섭이는 흘끔 나를 쳐다봤다. 찬성하는 표시였다. 우리는 누워서 찬송가를 불렀다. 배고픔을 참으려고 불렀다. 창섭이는 목소리를 높여 제법 신나게 불렀다. 1절, 2절, 3절, 4절·· · · ·. 되풀이 되풀이 불렀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 누가 먼저 지쳐 버렸는지 우리는 어느새 깊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 달이 흘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창섭이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서새니, 배 아뿌다."* 나는 조금 놀랐다. 창섭이가 배고프다는 말은 했지만, 배 아프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슬픈 얼굴을 가끔 보여 줬지만 눈물은 보여 주지 않은 것처럼. (* 선생님 배 아픕니다) "배가 아픈 건 네가 옷을 꼭꼭 여미지 않아서 바람이 들어가서 그런 거야."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창섭이 옷을 대충 여며 주고 떼밀어 쫓아 버렸다. 그의 부모, 형제, 친척, 골목길 아이들, 동네 어른들, 교회의 집사, 장로, 교회 학교 선생님이 그랬듯이. 배가 아프다고 한 창섭이를 내가 떼밀어 쫓아 버린 다음 날, 창섭이가 죽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새니도 냉가 시치?" 보슬비 내리던 가을날 창섭이가 내게 들려준 한마디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창섭이는 어쩌면 무거운 소명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난 천사인지 모른다. 벌레 한 마리가 책 모서리로 기어가고 있다. 잡으려고 손을 가까이 대다가 주춤했다. 한 마리의 벌레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건 더없이 고귀하다. '관객과 배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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