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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제16회 경기신인문학상 수필 당선작 <아버지 모자>이원화관객과 배우 2012. 12. 6. 22:53
제16회 경기신인문학상 당선작 <아버지 모자>
심사평
이원화의 <아버지 모자>는 아버지의 청회색 모자에 화자의 시선이 닿아 있다.
참신한 소재, 낯선 화자의 시선이 '모자'라는 평범한 소재에 의미를 갖게 한 점이 돋보인다.
'부정(不淨)'이란 담론의 주제를 우회적인 회감으로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감동하게 한다.
자기관조와 성찰이 돋보이며 행간에 담은 의미 또한 깊이가 있다. 내일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한상렬 記)
아버지 모자 / 이 원 화
청회색 모자가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형제들과 함께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가 사시던 집으로 갔다. 큰오빠는 영정사진을, 둘째오빠는 탁상시계를, 큰언니는 찻잔을, 셋째오빠는 옥편을, 모두들 고인을 기념하기 위해서 유품을 하나씩 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막내딸인 나는 청회색 모자를 집었다.
그것을 잡는 순간 양심의 가책과 후회가 뒤범벅이 되어 눈물로 쏟아졌다.
얼마 전만 해도 일제라면 무엇이든지 다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일본백화점에 들어가면 환율을 생각하지도 않고 일제 블라우스, 핸드백, 남편 넥타이, 코끼리표 밥솥, 아이들 옷, 장난감, 심지어는 어묵, 단무지까지 정신없이 사들고 왔었다.
어느 해 전시행사를 마치고 일행들과 야경을 보러나갔다가 길거리 좌판에서 400엔짜리 모자 하나도 사왔다. 아마도 우리나라 돈으로 약 4천원쯤 되는 것을 멋지게 포장하여 우쭐대며 아버지께 갖다드렸다.
당신의 사랑을 독차지한 막내딸이 선물한 모자를 보통 때는 아까워 잘 쓰지도 않으셨다.
혹시 그 모자를 쓰고 외출하였다가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면 벗어서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아끼셨다.
제 남편과 자식만을 챙기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딸은 솔직하게 그것이 얼마짜리라고 말씀을 드리지 못하였다. 그저 잘 어울리고 멋지다고 맞장구만 쳤을 뿐이다.
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다. 지금은 국가 땅으로 귀속되었지만 서울역 근처 신화 상회라는 이름으로 제법 큰 미곡상회를 경영하셨다. 전국기독교연합집회 때 타지방에서 온 교역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교회행사 때마다 가마니로 떡을 만들어 봉헌하셨다.
어쩌면 아버지는 내 마음을 모두 알고 계셨을지 모른다.
결혼 후 지갑 속에 사진을 넣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처음에는 우리부부 결혼사진, 큰아들 낳았을 때는 큰아들 사진, 작은아들 낳았을 때는 작은아들 사진 그리고 손자손녀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요즈음은 고인이 되신 부모님 사진을 넣고 다닌다.
그 흑백사진은 변색되어 흐린 밤색이 되었다. 그 속에서 웃고 있는 신사는 어깨통이 넓은 롱코트에 신사용 중절모를 멋지게 쓰고 마치 모델걸음을 걷고 있는 스냅사진이다.
아버지 중절모가 참 잘 어울린다.
시간은 탄천의 물같이 흐른다.
다음 기회에는 꼭 정품 모자를 사다 드려야지 하며 미루기만 하다 실행하지 못한 딸을 비웃듯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모자의 값을 말씀드렸어도 상관없이 좋아하실 분인데, 왜 숨기고 당당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세월은 적절한 때를 일러주지 않을 뿐 아니라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어제는 남편 모자를 사러 백화점에 갔다.
진열된 여러 가지 모자 중에 청회색 모자를 보는 순간, 아버지를 만난 듯 옛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과거를 돌아볼 여유 없이 하루를 바삐 살아가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흐르는 강물처럼 후회도 그저 흐르고 있다.
당선소감
올가을은 유난히 단풍이 곱습니다.
제게 반가운 소식을 전하려고 단장한 듯 합니다.
문학 동네를 떠나 다른 분야에서 젊음을 태우고 다양한 삶을 지내다가
'경기도신인문학상’은 저를 설레게 합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젊음을 위해 백발에 검은 색 물들이던 것을
이젠 고운 단풍빛깔로 바꿀 것입니다.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시간을 찬란한 사랑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부족한 저를 춤추게 만들어주신 주변의 여러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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