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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호 시인의 <달력>외 2편관객과 배우 2020. 4. 28. 20:28
『月刊文學』615
2020년 5월호에서 옮김
달력 외2편/정민호
1
달력은 죽어 있다
죽은 달력의 내부에 해가 뜨고
360 다섯 개의 모발이 바람에 날리며
먼 미래의 강을 건너고 있다
까맣게 쌓인 태양이 비에 젖어
전지(戰地)의 군화처럼 우리를 위협한다.
기침을 하면 사라지는 하루의 일과가
하나하나 이마에 머물고,
미래의 꿈을 날라다가
우리들의 일상을 점검한다.
시간이 쌓인 시간의 뭉치 속에
오르르 굴러 나와 인사도 하지만
문밖에는 또 하루가 남아
경험처럼 가슴에 와 박힌다.
우리의 뼈와 사고(思考)를 갉아내는
그것은 희한한 좀벌레다.
2
시곗바늘을 낡게 하는
그것은 영원의 정지(停止)의 움직임이다
눈을 통해 나를 독살하게 하고
나를 점령하게 하는 빨치산의 총검이다
역사를 만들고 전쟁을 도발하는
호전자(好戰者)의 이빨에 깨물린 웃음이다
번쩍이는 지혜로 하여
권모의 왕관도 잠재우는
그것은 결국 영원한 죽음이다
3
달력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하얀 종이쪽이 시간에 쫓기고
달력 속에 한 사나이가 걸어 나온다
그의 머리에도 찬란한 태양이 걸려
사계(四季)가 봄 바다 위에 떠오르고
계절에 쫓긴 철새가 둥우리를 찾아
벽에 걸린 달력에 날아오른다.
어린 아이가 달력을 뜯는다
달력을 뜯는 아이의 턱에 수염이 열리고
승산(勝算)도 패배(敗北)도 아닌 위력이
휴지 위에 조용히 버려진다.
떨어진 달력이 바람에 흩날려도
그것은 결국 시간의 파편만은 아니다
경주 '귀로' 다방
그때는 그랬지,
멋스럽게 기대앉아 종일을 몸을 비비고 차를 마셨지
오가는 농담으로 마담과 함께
희망곡도 보내고 모닝커피도 마셨지.
시인 한하운도 왔었고,
가짜 귀하신 몸, 이강석도 앉아
경찰서장에 전화 걸어 호통도 치던 그때 그 시절,
"귀하신 몸, 어찌 혼자 오셨나이까?"
다음부터 여기 오는 손님은 모두가 귀하신 몸,
한하운 시인을 만나러 수십 리 길을 걸어오고…
붐비던 곳, 그 '귀로' 다방 2층은
늘~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르내렸지.
그 쿵쿵거리는 소리도 추억으로 길 떠나고
아득한 세월 속으로 묻혀 사라져 버렸다.
낭만도 없고 멋도 없는 그냥 그대로를 남기고
"귀로" 다방은 멀리 길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옥천 '향수' 다방에 들려
정지용 생가 앞, 여울 건너면
옛날식 다방 '향수'가 있었다.
여울 건너 '향수' 다방에 들르니
아줌마들이 와르르 몰려와 손님과 함께 앉아서
"신사 양반, 차 한 잔 사 주쇼."
늙은 다방 아가씨도 미소를 보낸다.
그렁그렁한 얼굴로 함께 앉으며
엉덩이를 들이밀며 차를 달랜다.
농담 반 진담 반 '향수'가 뭐냐?'고 물으니
여자들이 다 가지고 다니는 거라고 한다.
정지용의 「향수」를 아느냐 되물으니
그 양반은 외제 향수를 좋아했죠? 아마!
아마! 아마! 아마!
떠나올 때까지 그 '아마'가 자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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