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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수_민들레 외 4편
    관객과 배우 2020. 8. 29. 21:43

    《月刊文學》619

    2020년 9월호

     

    조영수 시인 ㅣ 대표작

     

          민들레                     

     

    소문나지 않게

    바람이 만지거리던

    맨살의 풀밭에다

    그녀가

     내게 벗어 준 밤

    부끄러워 속 붉히던 달빛을

    누가 한 줌

    집어다 놓았나

     

    그런 시절이 있었지              

     

    사랑과 미움 만남과 헤어짐만으로 시를 쓰고

    검정과 흰색으로만 그림을 그려 보고 싶었지

    노을에 몸짓을 던지는 저녁 새를 바라보며 울먹이거나

    눈 감을 때마다 그리운 얼굴들을 지워내기도 했었지

    김소월의 진달래는 사랑 아니라고 고집을 부리다가

    내 속앓이를 밟고 떠난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지

    가을 숲에 숨어든 바람에게 비워두고 떠난 자리는

    어떤 색깔로 물들이겠느냐고 실없는 물음도 던져 보았지

    브람스의 바이올린협주곡3악장을 건성으로 들으며

    집시여인의 춤추는 치맛자락을 이야기하기도 했었지

    눈시울 젖을 때까지 시를 읽으려다 잠을 설치거나

    내 생각 안에다 낙엽을 날리면서 어지럽히기도 했었지

    어디에서도 끌림을 찾을 수 없는 내 시집을 건네면서

    가슴이 떨릴 거라고 우기던 그런 시절도 있었지

     

    섭리(攝理)                  

     

    강은 제 길을 찾아 흘러 보내야

    바다와 몸을 섞을 수 있고

    나무는 꽃향기를 멀리 보내야

    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답니다

     

    새는 하늘을 멀리 벗어나야

    푸른 잎 가득한 숲과 만날 수 있고

    품고 있던 미움을 버릴 줄 알아야

    따뜻한 이웃을 만날 수 있답니다

     

    만남의 첫걸음은 어디부터이고

    헤어짐의 끝자락은 어디까지인지

    일러주지는 않고 몸짓만 뒤채는 강은

    멈춤이 없어야 길을 찾을 수 있답니다

     

    세상 안과 밖을 휘돌아 가는 물길은

    제 모습을 잃지 않고 흐르면서도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흐름을 머멈추지 않아야

    지긋한 이름 하나 얻을 수 있답니다

     

    겨울바다                       

     

    바닷새 울음 가뭇가뭇 띄워놓은 겨울바다

    배란기에 달아오른 파도 이랑에서

    봄비에 씻어낸 보이밭 냄새가 난다

    바람에 밟히지 않은 제비꽃 무더기가

    제 빛깔 풀어놓느라 손 시린 줄 모른다

     

    허난설헌의 저릿한 시 한 수

    읊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잠에서 깬 소나무숲을 흔들며 달려 나온

    가슴 뜨거운 바람 한 자락씩 안겨주는

    속살이 파릇파릇한 겨울바다

     

    기울어진 낮달 뭉개진 다른 쪽을

    집어등 불꽃으로 되살려 내기도 하지만

    봄 꽃잎 물고 있는 비릿한 웃음소리를

    올이 굵은 눈발 사이 사이에다

    푸름으로 출렁이게 하고 있다

     

    꿈을 파묻고도 삽자루 부러지지 않는 세상

    몸을 풀고 겨울 파도 앞에 서 보라

    배란기의 파도 이랑에 던져버린 허망 덩이가

    등 푸른 날게를 활짝 펴고 있는 모습을

    자주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달에 대한 기억                        

     

       낮달을 참하게 띄워놓은 맥주집 '月光'에서 우린 몇 번씩 접었다 펴 놓은 제 그림자를 깔고 앉아 세상보다 차가운 생맥주를 마셨다.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죽여 놓은 이웃들의 뒷이야기를 휴대전화에서 꺼내 펼쳐 놓고 취기 없이 마른 안주로 씹었다. 생화라고 우겨대는

    시든 여자들은 목숨보다 질긴 그들의 시간을 바둥대며 물고 늘어져 있었지만 그들보다 더 취하고 싶지 않아 우린 가을달보다 더 맑은 정신으로 맥주집 '月光' 나왔다.

     

       봉분을 열고 나온 아버지적 창부타령은 탁본에 걸어놓은 장터 '月仙집' 조붓한 목로에 우린 자리를 옮겨 앉았다. 개밥바라기별이 감나무에 걸려 익고 있는 노을을 지워낼 때를 기다렸다가 한 사발씩 그림자 걷어낸 가을달을 서로 권하면서 마셨다. 어둠이 달라붙지 않은 달빛이 온몸을 들쑤시며 타오른다.  '月光'에서 달아났던 취기가  '月仙집' 목로에 옮겨붙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림자 없는 가을달을 안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조영수_월간문학으로 등단,시집《세상 밖으로 흐르는 강》, 《네 안에서 내안으로》 등 윤종주문학상, 한국예총예술문학상 외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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