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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집
햇살이 술을 마신다. 거리는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뽀
얗다. 나는 버스 안에 앉아 술에 취해 이글거리는 햇살을
본다. 한 소녀가 버스에 오르며 묻는다. 이 버스는 천국
으로 가나요? 햇살이 일그러지고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
칫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 꽃잎이 비
틀거리며 이글거리는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차창 밖으
로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사람들이 와 좋아한다. 나도 꽃
잎이 되고 싶어요! 아가씨가 황급히 벨을 누른다. 햇살은
집이 없다. 사방 어디를 가도 햇살이 누워 있다. 나는 집
없는 햇살이 시큼한 솔내를 풍기며 창가로 살짝 몸을 기
대는 것을 보았다. 잠이 온다. 저 햇살에 집을 주고 같이
무너져내리고 싶다.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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