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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라그러스 나도 라그러스관객과 배우 2011. 1. 28. 20:24
2010년 좋은 문학 詞華集
<한국을 빛내는 작가들> -무엇을 이루어 다시 너를 만나리- 중에서
<너도 라그러스 나도 라그러스 >
이 원 화
'라그러스의 꽃'은 햇빛보다 그늘에서, 그늘에서 보다 석양빛에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한 폭의 수채화보다 더 신비스러운 빛깔을 가졌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라그러스 길을 걸으며 그 오묘한 빛깔에 푹 빠져 있다.
가을 동요 부르며 수양버들이 탄천물 위에서 춤을 춘다. 네모난 돌덩이 징검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탄천을 내려다보는 예쁜 길이 있다. 그 길은 자연스런 아취 모양으로 마치 신랑신부가 웨딩홀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되어 있다. 오른쪽은 벚나무 가지가 팔을 올리고 왼쪽은 단풍나무와 자작나무가 소녀들이 발레하 듯 둥글게 서 있다. 이렇게 예쁘고 시원한 나무 아취 속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 편안한 사람들보다 온통 얼굴을 싸매어 미라 같은 사람이 더 많다. 왜 그럴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첫사랑을 만나듯 설레는 마음으로 굽은 모퉁이 길을 지나 돌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텅 빈 구미교가 보이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바로 토끼꼬리를 닮은 풀 '라그러스'가 넓게 떼지어 피어 있다. 그 키는 성인의 양팔을 수평으로 펴고 걸어도 팔에 닿지 않을 정도이다. 한 뿌리에서 10개 정도의 줄기가 곧추 서 나오고 타원형의 꽃송이는 사방으로 굵은 털이 뻗쳐 나와 있다. 만지면 찌를 것 같은 가시모양이지만 솜털처럼 폭신하고 보드랍다. 많은 '라그러스'가 피어 있는 들판 한가운데에 두 길이 나 있다. 한 쪽은 돌길이고 다른 한쪽은 흙길이다. 돌길은 막돌을 듬성듬성 깔아놓았고 또한 길은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좁아서 모델 걸음같이 일자로 걸어야한다. 이 두 길 양쪽에는 참새가 날아가 듯 유연한 곡선으로 휘어진 '라그러스'가 걷고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 길은 지나가도록 만든 돌길이지만, 가을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 빛이 나며 가을볕에 말끔히 말라서 밟고 지나기가 너무 아깝다. 가을의 아이돌 인양 뽐내는 잠자리처럼 머무는 듯 건너뛰어야겠다.
'라그러스 꽃'은 가늘고 긴 줄기로 살랑거리며 빨리 함께 손잡자고 보채듯 옆구리를 스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당신의 친절에 감사해요'라고 대답하는 이 말은 '라그러스'의 꽃말이다.
햇볕이 식곤증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따가운 오후지만, 빨리 만나고 싶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구미교 못미쳐 왼쪽으로 걸었다. 동막천을 향하여 '라그러스'가 줄지어 피어 있는 길을 한참 걸었다. 똑바로 가다보니 스페인의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 같은 멋진 곡선 모양의 낙생교가 보인다. 그 낙생교 밑을 지나자마자 오른편 냇가로 바로 내려가면 라그러스의 군집 속으로 파묻히게 된다. '나도 라그러스 너도 라그러스'
수지까지 연결되는 조용한 낙생교 지나 동막교 지나면 동막천1교가 나온다. 거기에서 유턴하여 냇가 쪽으로 내려오면 빌딩숲 같은 은빛 갈대와 라그러스 숲이 있다. 그 속에서 은밀히 놀고 있는 잠자리를 만난다. 낮게 흐르는 냇물이 맑고 조용해서인지 잠자리 한 쌍이 몸을 씻으며 서로 날개깃을 말려주고 있다. 날아다니는 잠자리 날개 속에서 하늘이 비친다
가을 바람에 싸인 내 그림자가 앞에 서서 걷는다. 뒤에서 비추는 석양빛은 좁은 어깨를 통해 앞가슴까지 퍼진다. 빛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비춘다. 하루 끝을 마무리하는 석양빛을 받은 수채화 같은 '라그러스'는 찬란한 황금색으로 변신하고 있다. 참으로 황홀하다. 그들을 화려한 황금색 꽃으로 피우는 저 석양빛처럼 그런 역할을 하며 살고 싶다. 동막천 냇가 양편에 피어 있는 '라그러스 꽃송이가 바로 가을'이고, 그 '라그러스를 사랑하는 우리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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