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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변과 한 컷/이원화
    관객과 배우 2013. 2. 24. 23:17

     

     

                                                                               죽변과 한 컷

     

     

                                                                                                                            이원화

     

       죽변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포항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열한시간을 달려야했던 지난날과 달리 잘 닦인 도로 덕에 네 시간 만에 도착했다.

       덕구온천에 짐을 푼 우리는 죽변의 인정을 찾아 죽변항으로 향했다. 죽변항은 조용하고 쓸쓸했다. 막대기에 꽂힌 채 해바라기 하는 새끼 가자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꽁지 꿰어 도열하는 오징어들이 일렬종대로 서서 우리를 반겨주었다. 한 컷 찍고

       바닷가에 왔으니, 회 한 접시와 매운탕 한 그릇 정도는 먹어야할 의무가 있는 듯 원조 맛 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화려한 간판이 걸려있는 식당보다 해풍에 삭아 낡은 간판을 찾았다. 주인이 권해주는 몇 가지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밖으로 나왔다. 바닷바람, 파도소리도 모두 수평선 따라 흘러갔는지 고요했다. 흰 갈매기들은 우리를 반기는 듯 우리 일행 주변을 따라 다닌다. 한 컷 찍고

       매운탕 맛도 수산시장에서 먹던 것과 별 차이가 없었건만 바다를 앞에 두고 앉은 시간은 풍족했다. 호텔로 돌아가려고 완행버스를 기다린 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차는 오지 않았다. 여행다운 여행을 위해 버스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쉴 새 없이 차와 사람이 다니는 이차선 도로 버스 정류장에서, 노점에 걸려있는 청바지처럼 '그래, 이것이 슬로시티의 참맛'하며 견디고 있었다. 교회 탑에 걸려 있는 저녁노을도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동네 강아지들도 힐끔 보고 지나갔다. 한 컷 찍고.

     

       온천 스파에서 수영복과 수영모를 꼭 착용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친구들은 미리 준비를 한 모양이다. 수영복을 대여하려 했으나 그런 시설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냥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온천 직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구티셔츠와 모자를 빌려 입고 고집불통 억지를 부려 입장을 했다. 끝날 무렵이라 사람들이 몇 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물속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반바지와 티셔츠 속에 물인지 공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천장의 주의사항을 지킬 것을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야외 스파로 나갔다. 망신살이 무지갯살 뻗치듯 하니 도리어 배짱이 생겨 젖은 옷의 물기를 쥐어짜면서 세상에서 가장 못난이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 나갔다.

       옥외 온천물은 어머니 몸 속 양수인 듯 천진한 행복을 주었다. 얼마쯤 앉아 있었을까 가을 산으로 숨어드는 일몰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얘, 앉아라!" 단호한 친구 목소리에 어머니께 벌 받던 유년이 떠올라 슬그미 팔을 내렸다.

     

       온천 뒤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응봉산 자락을 만나게 되는데, 그 계곡 입구에서 등산객 인적사항을 체크하는 것을 보니 꽤 높은 산인 듯싶다. 친구들은 발걸음도 빠르게 열심히 계곡을 따라 오른다. 뒤쳐져 홀로되었지만 파란 하늘과 곱게 물든 단풍이 있으니 어린아이처럼 즐겁기만 했다. 가곡도 한 곡조 뽑고

       자비스런 와불 닮은 바윗돌과 나란히 셀프촬영도 했다. 산을 천천히 내려오다 산지기 청년을 만났다. 칡덩굴에 피는 꽃은 작은 포도 알처럼 예쁘고 향기도 좋다고 했더니, 내 짧은 지식에 반가워하며 칡덩굴을 둥글게 한 움큼 감아 준다. 한 컷 찍고

     

       온천 동네여서인지 시월의 마지막 새벽인데도 훈훈했다.

       언제 왔을까, 노점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렇게 새벽에 어디서 오셨어요?",

       죽변에서 첫차로 올라왔다고 한다.

       첫 번째 자리에는 낡은 주머니 속에 녹두, 좁쌀 따위의 잡곡이 제 빛을 내며 담겨져 있다. 그 다음엔 호박오가리 같은 채소 말린 것들을 나란히 놓여있다. 야구 모자를 쓴 할머니는 볶은 메뚜기를 먹어보라고 손에 올려준다. 그 중에 대장인 듯 팔십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는 머리에 무명수건을 둘렀다. 손님이 물건을 고를 때 옆에서 자기 물건을 팔려고 선전하면 절대로 아니 된다고 곁눈질 하며 크게 말씀하신다. 마지막엔 아직은 할머니 티가 없는 듯, 옷 빛깔도 세련된 분이 앉아 있었다. 자외선 차단 마스크를 쓰고 운전기사아들을 자랑하면서 고춧잎, 감 두 개를 내놓고 있다.

       이 할머니들은 물건을 흥정하면서도 재래종 알밤을 계속 깎았다. 할머니들의 손놀림은 기계보다 더 빠르게 시간을 깎고 있는 듯했다. 손마디는 금방 캐어낸 생강을 닮아 울퉁불퉁하지만, 말갛고 투명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끌벅적하게 붐비는 장터가 아니라 고요하기까지 한 양지바른 모퉁이에서 할머니들은 사람이 그리워, 용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만원어치만 살 것을 마음먹었는데 네 분 모두의 것을 골고루 사다보니 한 짐이 되었다. 돌아서는데 대장할머니가 곱게 깐 밤 한 톨을 건네준다. 순간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파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뭉클함과 슬픔이 겹쳐서 밤 한 톨이라도 그저 받아먹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 저하고 사진 한 장 찍어요."하며 셀프촬영을 했다.

     

       우리는 짐과 보따리를 안고 완행버스를 탔다. 죽변 정류장에서 오일장을 구경하는 행운도 얻었다. 바닷가 오일장의 경험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장터 한복판에 잘 생긴 붉은 감이 플라스틱 방석을 깔고 앉아 뽐내고 있다. 그걸 찍으려는데 없다. 카메라가 없어졌다.

       2박3일 내내 행복했던 일상이 빠져나간 듯했다. 행여 장난으로 숨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친구표정을 살펴보니 모두 얼음처럼 굳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만 주저앉아 버렸다. '죽변의 한 컷'을 몽땅 잃어버렸다.

     

       집에 와서 짐 정리하는데 여행의 추억들이 동영상 되어 쏟아져 나온다. 배경음악은 깔지도 않았는데 분명히 소리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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