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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회와 놀고 있다>, <반다 꽃 벽걸이>_이원화
    수필은 시도다 2017. 12. 21. 23:26

     유정림 외 27인 지음

    『놀 자』

     분당수필 문학회 제20집 출간

     

     

     

     

     

    후회와 놀고 있다/이원화

     

    위로가 필요해 전화를 걸었다. 열흘 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들려왔다. 피자와 스파게티, 햄버거 1세트를 주문해 서로 나누어 먹는데, A는 잘 먹지 않는 B를 향해 "왜 그러니, 많이 먹어라"고 권했다. 순간 생소하게 B는 "걱정 마, 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하며 손을 저었다. 놀란 어색함이 식탁에 흩어졌다. 그걸 보던 C는 "쟤는 참 깍쟁이야, 많이 먹으라는데 뭐 그렇게까지"하였다. 4명은 소꿉놀이 동무로 B가 가장 가까운 사이라 여겨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 전화 속의 B는 폭우의 속도로 거칠었다. "네가 그럴 수 있느냐, 상처가 뭉치로 있다"고 한다. C는 미안하다고 했다. 넌 늙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말하며 말이 없는 냉장고를 쳐다보았다. 창문너머 운동장만큼이나 마음이 허전해졌다. 무조건 사과를 했다. 한 면의 친구를 보고 또 한 면의 인생을 보게 된다.

    햄버거 집에서 윤여사와 커피 마시는데 중앙 테이블에 교복 입은 학생들 몇 명이 몰려 있었다. 여학생의 괴상야릇한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뭐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데, 윤여사가 내 손을 잡는다.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남학생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뽀뽀하는 타임이란다. 파티 끝내고 나가던 남학생이 손가락으로 욕하며 지나간다. 귀가 확인 중이다

    협회에 새로운 회장이 입회하였다. 그는 첫 문장만 경어를 쓰고 두 번째 문장부터는 사투리로 반말을 사용한다. 타인과 빨리 친하고 싶어 반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더니, 여럿이 있는 곳에서 말하느냐는 눈빛에 그만.

    언어에도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말하는 이기주작가의 『언어의 온도』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언어에도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르다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 한마디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그 소중한 사람이 떠나갔을 수도 있다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늘 무엇을 말하느냐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때론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다. 입을 닫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잘 말할 수 없는 지도 모른다."

     

     

     

    반다 꽃 벽걸이/이원화

     

    정情이란 고전古典과 같은 것이다.

    고전이란 세월을 묵혀야 한다. 정도 많은 시간을 익혀야한다. 고전은 순수한 것, 정도 순수해야 쌓이고 쌓인다. 고전은 늘 그 자리에 있듯이, 정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고전은 과거가 미래가 되게 하는 것으로 정도 과거에서 미래까지 연결되는 것. 고전은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문학이나 미술, 음악 예술작품으로 3백년, 5백년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것을 말한다. 개인한테만 좋은 것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만 좋은 것이 아닌, 전 세계 다수의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인 것'이라 한다. 천양희 시인은 책 중에서도 고전은 책의 에베레스트라고 했다.

     

    월례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반듯하게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는 의자가 놓인 회의실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와락 잡는 손이 있다. 수 만평 농장을 스스로 가꾸고 운영하고 있는, 멈춤이 없는 D의 손은 불퉁불퉁하고 메마르지만 어머니 눈빛처럼 따뜻했다. 사회석의 배경이 된 병풍 뒤로 나를 이끈다. 눈에 띄는 검정색 비닐봉지는 화가 난 듯 웅크리고 있다. 조심스럽게 펼쳐서 들여다본다. 순간 환하게 터진 가슴이 뛴다. 그의 작품은 늘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화훼시장에서 볼 수 없는 소재로 제작하기 때문이다. 먼먼 거리에서부터 들고 왔을 D의 어깨를 생각하니, 마음이 뛰지만은 않았다. 그의 정다움은 어떤 것일까. 푸른 빛 솜구름일까, 푸른색에 갈색을 띈 왕 보리수 가지로 싸리문을 눕힌 모양에 손잡이를 매단 프레임을 구성하였다. 지중해 빛 반다를 중심으로 노랑, 자주 들국화를 곁들인 '반다 꽃 벽걸이'

     

    의정부에서 양주 행 버스를 타고 덕정사거리에서 내렸다. 버스를 타고 온 거리만큼 한참 걷는다. 언덕을 넘어 왼쪽으로, 조용히 햇빛을 품고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퇴락한 기와집 한쪽 기둥이 벌거벗고 있다. 삐걱 소리가 들리는 듯 대문 한 짝이 떠나갔다. 멀리 보이는 앞산까지 혼자 가기는 외진 길이다. 무섭고 겁은 났지만, 그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을 것 같아 용기가 더 했다. 노래 한곡 중얼거린다. 붉은 빛만 남은 나무들이 무리무리 바람과 왈츠를 추고 있다. 희끄무레 움직이는 손짓이 보인다. 나도 흔들었다. 늡늡한 그를 청춘의 첫머리에서 만나 꽃이 지고 그림자조차 가버렸다. 김장철엔 함께 김장을 담았다. 한 번은 찧은 마늘을 빠뜨려, 땅에 묻은 김장배추를 전부 꺼내 다시 담은 때도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입던 옷을 주고받아 입혔다. 그 당시 여성의 사회생활엔 희생과 헌신만을 요구하는 부분이 많았다. 거부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 없는 관계에서 서로가 마음 문 열고 힘듦에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집을 찾았을 때 별채에 있는 부엌의 부뚜막, 아궁이도 반긴다. 늘 닦지 않아서 기름 끼 잃은 무쇠 솥은 말이 없었지만 밥맛은 여전히 구수했다. 구석에 놓인 술항아리가 나를 놓지 않는다. 그것은 십 여 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 나의 시조모께서 사용했던 것을 물려받았지만 그가 탐을 내서 줬다. 작은 순간에 힘들고 지칠 때, 삶의 방황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때 서로의 자신이 되어 주었다. 개인의 삶을 단순한 부속품으로 만들고, 시스템의 복잡으로 삶은 더 왜소해지고, 고유한 개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럴 때일수록 정이 필요하다. 그는 누구든 만났다 헤어질 때면 칡덩굴이나 예쁘게 켠 소나무 아니면 솔방울 몇 개라도 손에 쥐어 준다.

     

    "차 들어요, 꽃차요."

    정원에 핀 몇 가닥의 수크령처럼 멋진 그의 남편이 쟁반을 들고 다가온다. 그분은 그녀 오빠의 친구로 내가 자신보다 더 먼저 당신의 아내를 앎에 늘 샘을 내며 부러워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주렁주렁 붉은 감이 보인다. 순간 찻잔 속에서 감꽃이 보인다. 정이란 단순히 좋은 대상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 년에 서너 번이나 만날까, 두고두고 읽는 고전과 같이 보고 싶을 때 꺼내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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