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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에서 쓴 편지_정호승관객과 배우 2019. 1. 1. 23:59
『여행』
창비시선 362
정 호 승 시집
변산에서 쓴 편지/정호승
변산에서는 낙조대에 가지 않으려고 해도 가게 된다
낙조대에서는 해가 지지 않으려고 해도 지게 된다
아들아
서울에서 지는 해도 보지 못한 채 떠돌지 말고
빌딩 사이로 뜨는 해도 보지 못한 채 잠들지 말고
변산 앞바다에 와서 먼저 지는 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라
해가 왜 지는지
해 지는 갯벌이 되어 세발낙지처럼 편안히 발을 뻗고 누워보라
소라껍데기 속에 웅크린 주꾸미처럼 웅크려
고요히 해 지는 소리를 들어보라
골목 끝까지 너를 따라다니던 희망의 흰 그림자가 비로서
웃음을 되찾고 자꾸 웃을 것이다
너도 덩달아 하얀 웃음의 알을 주꾸미알처럼 자꾸 낳을 것이다
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지지않고 어떻게 해가 뜨고
지지않고 어떻게 너를 이길 수 있겠느냐
아무리 바빠도 아들아
오늘은 변산 앞바다에 떠오른 일몰의 연꽃처럼 왔다가라
직소폭포 물소리에 한쪽 귀라도 씻고 돌아가라
가다가 격포 채석강 붉은 절벽에 매달려
만권의 책을 꼭 읽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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