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지성 시인선 545, 펴낸날2020년9월9일
《천사의 탄식》 마종기 시집
서울의 흙
1
어릴 때 살던 헌 집에 50년만에 들어가도/눈물진 주위에는 낯익은 이 아무도 없어
빈 가슴 아쉬워 좁은 마당의 흙 한 줌 긁어/황급히 바지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왔다
옛 가족의 정든 목소리 웃음의 한 줌인데/왜 그리 기분이 푸근하고 따뜻해지던지,
그 이야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이렇게 어정대다가는 잘못될 수도 있어
드디어 아내에게 지나가는 척 말했지./혹시라도 내가 이국땅에서 갑자기 가면/ 이 한 줌 흙을 꼭 내 손에 쥐어달라고.
요즘도 가끔 작은 상자의 흙냄새도 맡고/어떤 때는 손가락으로 조심 건드려보지만
어쩐지 갈수록 정든 흙이 줄어드는 느낌,/제 집을 떠나면 증발을 하나 바람을 타나,
적어지는 흙을 보니 은근히 조바심 난다./손에 쥐고 가기에 모자라지는 않을까,
가끔은 무슨 말을 하는 듯 광채까지 난다./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은 이별이겠지만
내 흙을 보고 있으면 이별도 부드럽다./곁을 떠난 사람도 오가는 길에 보인다.
2
흙은 서울의 흙이든 해외의 흙이든/인간의 몸을 채우는 재료라지만
같이 살던 흙에서 떼어놓으면/천천히 사라지고 마는 것인지
혼자 산다는 게 그렇게 힘든 것인지/싱싱한 냄새도 풀 죽어 시들고/꽃을 키우던 든든한 힘줄도 보이지 않는다
인연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모르지만/일부러 헤쳐 만든 인연은/오래 가지 않는다.
흙이 왜 흙을 그리며 쓰러지는지/ 누군가는 언제쯤 내게 알려주겠지.
사순절의 나비
나비가 왜 한마디 말도 안 하는지 몰랐다/쏟아놓은 말들이 날개에 붙으면
몸이 무거워 날 수 없다는 것도 몰랐다/나비는 언제까지 애벌레처럼 살지 못한다
꽃 속에 들기 위해 소리를 감추는 미소 몇 개,/대꾸하지 않는 다문 입에도 봄이 피어난다
목련의 딸이 죽었다고 문상 온 나비의 절./나도 돌산에 오르며 기도로 끝낼 것 그랬나?
땀과 피에 범벅이 되어 그 산에 오르던 침묵이/오히려 나를 감싸며 위로해 주었다. 올려다보면
사랑은 인내라며 그간에도 순명의 고통으로/몇 번이나 온몸이 찢어지고 무너진다.
나비가 날개를 펴는 사순절 근처의 햇살,/모든 죄를 용서해준다는 당신의 숨결이
내 날개의 지향을 확실하게 고쳐준다./쓰러지고 일어서다 다시 쓰러지는
모든 죽음이 끝나가는 봄의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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