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지성 시인선 548, 펴낸날2020년 10월26일
《오늘 하루만이라도》 황동규 시집
불빛 한 점
한창때 그대의 시는/그대의 앞길 밝혀 주던 횃불이었어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없던 길 내고/그대를 가게 했지. 그대가 길이었어
60년이 바람처럼 오고 갔다/이제 그대의 눈 어둑어둑,
도로 표지판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표지판들이
일 없인 들어오지 말라고 말리게끔 되었어
이제 그대의 시는 안개에 갇혀 출항 못 하는/조그만 배 선장실의 불빛이 되었군,
그래도 어둠보단 낫다고 선장이 켜놓고 내린,/같이 발 묶인 그만그만한 배들을 내다보는 불빛.
끄지 마시라.
밟을 뻔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오래 집콕하다/마스크 쓰고 산책 나갔다
마을버스 종점 부근 벚나무들은/어느샌가 마지막 꽃잎들을 날리고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는 색이 한참 바래 있었다/그리고 아니 벌써 라이락!
꽃나무들에 눈 주며 걷다/밟을 뻔했다
하나는 노랑 하나는 연분홍,쬐그만 풀꽃 둘이/시멘트 블록 터진 틈 비집고 나와
산들산들 피어 있었다/둘 다 낯이 익다
노랑은 민들레, 그리고 연분홍꽃은 무슨 꽃?/세상 사는 일이 대개 그렇듯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모른다/알든 모르든 둘 다 간질간질 에쁘다
어쩌다 지구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서로서로 거리 두는 괴물이 되더라도
아는 풀 모르는 풀 함께 터진 틈 비집고 나와/거리 두지 않고 꽃 피우는 지구는 역시 살고픈 곳!
그 지구의 얼굴을 밟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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