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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의 시집>>_김혜순
    관객과 배우 2021. 5. 22. 17:38

    새의 시집/김혜순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하는 순서

    그 순서의 기록

     

    신발을 벗고 난간 위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면

    소매 속에서 깃털이 삐져나오는

    새의 뺨을 만지며

    새하는 날의 기록

     

    공기는 상처로 가득하고

    나를 덮은 상처 속에서

    광대뼈는 뾰족하지만

    당신이 세게 잡으면 뼈가 똑 부러지는

    그런 작은 새가 태어나는 순서

     

    새하는 여자를 보고도

    시가 모르는 척하는 순서

    여자는 죽어가지만 새는 점점 크는 순서

    죽을 만큼 아프다고 죽겠다고

    두 손이 결박되고 치마가 날개처럼 찢어지자

    다행히 날 수 있게 되었다고

    문득 발을 떼고

    난간 아래 새하는

    일종의 새소리 번역의 가족

    그 순서

     

    밤의 시체가 부푸는 밤에

    억울한 영혼이 파도쳐 오는 밤에

    새가 한 마리

    세상의 모든 밤

    밤의 꽂를 입에 물고 송곳같이 뾰족한

    에베레스트를 넘는 순서

     

    눈이 검고 작아진 새가

    손으로 감싸 쥘 만큼 작아진 새가

    입술을 맞대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새가

    새의 혀는 새순처럼 가늘고

    태아의 혀처럼 얇은데

    그 작은 새가

    이불을 박차고 내 몸을 박차고

    흙을 박차고 나가는 순서

     

    결단코 새하지 않으려다 새하는 내가

    결단코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라고 말하는 내가

     

    이 삶을 뿌리치리라

    결단코 뿌리치리라

     

    물에서 솟구친 새가 날개를 터는 시집

     

    시방 새의 시집엔 시간의 발자국이 쓴 낙서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연필을 들고

    가느다란 새의 발이 남기는 낙서

    혹은 낙서 속에서 유서

     

    이 시집은 새가 나에게 속한 줄 알았더니

    내가 새에게 속한 것을 알게 되는 순서

    그 순서의 뒤늦은 기록

     

    이것을 다 적으면

    시집을 벗어나 종이처럼 얇은 난간에서

    발을 떼게 된다는 약속

    그리고 뒤늦은 후회의 기록

                                                   (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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