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시도다

권현옥의 신작_돌아가는 길(월간문학 4월호)

갑자기여인 2016. 4. 4. 17:17

권현옥의 신작,『월간文學』4월호

 

                                               돌아가는 길

                                                                                                           

                                                                                     권현옥

                                                                                                          doonguri@hanmail.net

 

남자들의 덩치가 그렇게 부러웠던 나는, 남자의 뼈도 그리 작은 건지 몰랐던 나는, 남자의 야윈 등을 쓸어주며, 한없이 작은 인간의 등을 드드득 문질러주고는, 내 명치끝으로 파고드는 한 줄기 휑한 바람을 느꼈다.

모르핀이 링거 선을 따라 들어가면 무력함이야말로 견디기에 가장 좋은 무기라는 듯 환자는 온몸에서 힘을 놓고 견디고 있었는데 턱밑의 수염은 체념한 영혼의 몸에서 무심히 자라고 있었다. 남자의 위엄은커녕 영혼을 더 안쓰럽게 하는 몹쓸 증거로 보여 수염이 무서워보였다.

걷은 커튼 사이로 들어선 햇살은 어찌 그리 먼지를 노출시키는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겠어서 창문을 다 열어봐도, 먼지는 위 아래로 소용돌이칠 뿐 밖으로 나가는 않는 것을 보고야만 나는, 먼지처럼 삶과 죽음이 부유하는 병실에서 무엇에로의 환기를 기다리는 건지 몇 시간이고 서 있었다.

자질구레하고 요란스러운 게 삶이라 생각했던 나는, 망사커튼을 뚫는 햇살처럼 투철하고도 확실하고 고요한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나는, 무슨 말이든 전달하고 싶어졌는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이든 들을 수 있었지만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늙은 어미가 ‘멀구나 멀구나’ 하면서 따라온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아들의 병실, 견디려는 자식과 지켜보는 친척과 눈물 삼키는 혈육이 모였다. 누가 가장 슬픈 건지 모르겠는 나는, 혈육이 아니어도 자식을 낳고 몸을 나누고 영혼을 나눈 아내가 힘들 거라는 위로의 마음이 보내지면서, ‘더 슬프다’고 아우성하는 경연장도 아니기에, 내가 ‘덜 슬프다’라며 태연한 행동을 감추는 위선의 자리도 아니기에, 슬픈 것도 조심조심, 배려도 조심조심, 무심도 조심조심. 이성도 조심조심, 감성도 조심조심,

고통 없이 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 나는, 아니 이렇게도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건가. 끝까지 살려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마저 들고….

기억이 왔다 갔다 하는 노모는 아들의 야윈 모습이 원망스러운지 ‘이눔의 새끼야 정신차려’라며 정적을 깨고는 50세로 죽어가는 옆 침대의 남자가 궁금한지 딴청을 피운다. 자식을 앞세우는 부모는 기억을 꼭 붙들고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때, 노모는 물끄러미 보다가 혀끝을 차다가, 며느리가 더 애통하며 정성스럽게 뒷바라지하기를 바라는지, 며느리의 슬픔은 맘에 안 들어오는지, 자식에게로만 향하는 원초적 행동에 그만 모르핀을 맞고 참고 있던 아들도 소리 없는 짜증을 낸다. 아직 남아있는 마찰의 힘인가.

벽에 붙은 고린도 전서의 성경구절이 먼 나라 얘기인 듯도 하고. 울고 있는 혈육도 가슴이 저려 복도에 나가있는 형제도, 모두 각자의 무게로 고통이 일상이 되어가는 중이어서 잠시 무뎌진 자식과 부인을 보면 모두가 꿈속을 걸어가는 것같이 보였다.

오직 숭고한 사람은 죽어가는 육신을 닦아주기 위해 크리스마스 날 - 남들 다 노는 이날, 봉사하러 온 초로의 남자였다.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먼 곳까지 온 남자의 부지런한 몸짓을 물끄러미 바라본 나는, 할 말이 없고 부끄럽기만 했다.

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떠나면 남은 자들에게 살아날 뚜렷한 것 – 외로움, 허전함, 고통, 후회, 두려움이 바짝 다가왔다.

돌아가는 일은 이리 갑작스럽고 단순한데 남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힘을 지녔다는 것에 반발한다. 어찌 떠나야 하는가를 다짐해도 인력으론 부족하기에 오늘 밤도 기도를 해보지만 역시 기도를 의심한다. 어차피 하늘에 계신 당신의 계획 대로인가 하는 비애감과 그래도 모든 것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는 합리화가 습관처럼 온다.

지루해졌는지 노모는 ‘이제 가자’며 재촉을 한다. 며느리는 덤덤하고 냉정한 어머니가 서운하다는데, 노모는 돌아오는 길에 ‘아! 참~ 그 소나무 좋다~’하며 감탄한다. “우리 지금 어다 갔다 오냐?” “ 네?~~아주버님 병실 다녀오시잖아요.”

그곳은, 겨울 논두렁과 벗은 산의 나뭇가지, 그리고 춥지 않은 바람과 조곤조곤한 발자국과 아무래도 썰렁하고 허한 호스피스 병동의 긴 복도, 환자복을 입은 아픈 뼈와 살과 슬픈 영혼. 간간히 몽롱함 사이로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과, 살고 싶은 간절함과, 그 중간의 기다림이 햇살 속에서 둥둥 먼지처럼 떠다니는 곳이었다.

나도 돌아오는 길이 참 멀었다.

‘점심도 굶었으니 저녁 먹고 가자’는 제의를 거절했다. 또 모여 무슨 말을 나눌까. 혼자 슬퍼하고 싶은 나는, 아주버님의 마른 등이 손바닥에 ‘드드득’ 남아있었다.

잊을 수 있으면 잊으려고 살림을 부지런히 만져 봐도 손은 허공이었다.

 

 

권현옥

2001 현대수필 등단 수필집 <갈아타는 곳에 서다> <속살을 보다(2007우수도서)

<속아도 꿈결>

<커졌다 작아지다 (10회구름카페문학상 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