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문학회

한결문학회9월 모임_기형도의 문학세계

갑자기여인 2019. 9. 21. 13:07

 

 

▤ 한결문학회 2019, 9월모임

    내용- 시인 기형도의 문학세계

    참가자-김문한, 홍승숙, 박윤재, 김주순, 이소연, 이택규, 이원화

 

▤ 장소;좋구먼, 때;2019년7월20일

                                                          

 

 

▤ 오래된 서적/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 램프와 빵_겨울판화6/기형도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줍니다

 

 

 ▤ 빈집/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으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엄마 걱정/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해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김현(문학 평론가)

......

......

기형도의 시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은, 그의 현실에 역사가 없으며, 더 정확히 말해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는 비판일 것이다. 그 비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에 가깝다. 그 비판은 기형도 시가 연 시의 새 지평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며, 그의 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시를 비판하고 있는 비판이다. 그 비판은 몸이 약해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과 비슷한 비판이다. 그의 시의 약점을 지적하려면, 우선 그의 시의 차원 안에 있어야 한다. 나는 기형도의 시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부정성을 그 이전에 보여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아무리 비극적인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낙관적인 미래 전망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성복이 그렇고, 황지우가 그렇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에는 그런 낙관적인 미래 전망이 거의 없다. 그 도저한 부정성은이나 첼란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부정성이다(한국 시에서 그런 부정성을 보여준 시인은 누구일까? 이상? 이상에게는 그러나 치열성이 부족하다)기형도의 부정성은,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두 개의 출구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그 부정성을 더욱 밀고 나가, 유일한 육체의 추함을 더 과격하게 보여주는 길이며, 또 하나는 그 부정성을 긍정적 부정성으로 환치시켜, 혹은 발전시켜 해학·풍자· 골계(/익살)쪽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첫 번짼 길은 개별자의 갇혀 있음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줄 것이며, 두 번째의 길은 미래 전망의 결여를 운명적인 것으로 인식시킨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웃음으로써,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며, 문화적인 것이라는 것을 뒤집어 보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길은 비용이나 보들레르 등이 걸어간 길이며, 두 번째 길은 라블레김지하가 걸어간 길이다. 기형도는 그 두 길의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그 갈림길에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갈림길은 이제 다시없어 졌다. 이미 그가 노래한 것처럼.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 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 그 길은 생각만 해도 내 "얼굴이 이그러진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삶을 증오한다라는 끔찍한 소리를 다시 누구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고 해도.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시집에서 옮김)

 

 

▤ 문우님들의 작품 E-mailㄹ 보내주세요.

▤ 다음모임 10월30(수)12시 마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