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나를 받아주세요_노정숙
    수필은 시도다 2020. 12. 8. 16:33

     

     

    「나를 받아주세요」

     

    노정숙

    elisa8099@hanmail.net

     

     

    나 삼문 벼랑에 섰습니다.

    내가 먼 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 중에는 왜 하필 바쁜 시간에 부고訃告냐며 투덜대는 이도 있을 테고, 잠시 추억을 더듬으며 가슴이 저릴 사람도 어쩌다 있겠지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철든 후 내 생은 눈치보기의 연속이었지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림없는 일이지요.

    내가 떠나는 자리를 찾은 벗에게 두 번의 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나처럼 슬쩍 웃고 있을 내 영정사진을 보며 혀를 차는 대신 함께 씨익 웃어주길 바랍니다. 축제 같은 이별식이면 더 좋겠습니다. 잔잔하게 읊조리는 연도나 성가가 들린다면 황송하면서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병 없이 앓는 날이 길어지면 장롱이며 서랍 속에 남아있는 것들을 내보내야 하지요. 산 사람의 물건은 숨이 붙어 있지만, 죽은 자의 것은 주인이 먼 곳을 떠나는 순간 함께 숨을 놓지요. 책이며 옷가지며 쓸 만한 것은 서둘러 새 주인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오래 쓴 물건에도 혼이 깃든다는 것을 느끼거든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새 주인과 정이 들 시간이 필요하지요.

    말년에 어머니는 계절이 바뀌면 성급하게 없앤 물건들을 다시 장만해야 했지요. 그때는 필요한 것이래야 보온을 위한 옷가지 정도였지만요. 지나치게 깔끔했던 어머니의 뒤처리를 보며 눈 흘기던 게 어제일 같습니다.

    내가 어릴 때 우리집은 자주 시루떡을 했는데 네모반듯한 것은 모두 이웃에 나누어 주고 식구들은 귀퉁이 세모 조각만 먹었지요. 어머니 심부름으로 음식바구니를 들고 동네를 도는 일은 재미있었지요. 그러나 이런 어머니가 마냥 좋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내 살림을 하게 되면 나만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지요. 그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는 나중에 알았지만요.

    좋은 것을 다 나누어주던 어머니는 마지막 육신까지 가톨릭의과대학에 기증을 했습니다. 어머니의 유품은 정리할 것도 없었지요. 내게 남은 것은 어머니가 손수 짠 삼베 홑이불과 치자 물들인 명주 목도리가 고작입니다. 나 역시 자식에게 물려줄 게 변변찮아 눈 흘김 당할 건 뻔합니다.

    받아주세요. 숨을 놓은 내 육신을 바칩니다. 살아서도 한가롭지 않은 내 삶은 죽어서도 분주할 것 같습니다. 많이 혹사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쓸 만한 두 눈을 굳어지기 전에 누군가에게 얼른 주겠습니다. 무방비로 열어두었던 두 귀는 지니고 가렵니다. 늘 열어 놓았지만 제 몫을 했는지는 자신 없습니다. 다만 순명을 다하는 귀의 자세를 깊이 새기기 위해서 곱게 거두어 가려합니다.

    다 쓰지 못한 뇌는 그대로 반납합니다. 한 번도 명석한 적 없이 궁리만 무성했지요. 제대로 건져 올린 건 없지만 참으로 빡센 노동을 했습니다. 때때로 머리와 엇갈리는 의견에도 잘 버텨준 가슴이 대견합니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어깨가 단단하게 굳었습니다. 자주 칭얼대던 오른쪽 어깨에게 가장 미안합니다. 내 등뼈는 일찍이 위엄을 버렸습니다. 심한 스트레스와 쌓인 피로로 근육이 꼬였다고 하네요. 힘에 부친 맏며느리질을 오래하면서 저절로 비굴해졌습니다.

    부실한 대로 기꺼운 머리를 겨우 얹고 있는 긴 목은 늘 기울어 있었지요. 마음씨 후한 선배는 내 자세를 보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겸손의 표징이라고 했지만 실은 민망한 얘기지요. 무시로 들끓는 속내를 들키지 않았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매스라고하나요 그 벼린 칼로 가슴을 열 때 조심하세요. 늘 대책 없이 두근대던 심장 동네에서 아우성이 들릴지도 모르니까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웅얼거림이 가득할 거예요. 그곳은 아직 연륜이 만들어 준 빗금을 새기지 못했거든요. 수많은 잡것들을 걸러내던 콩팥이며, 쉬지 않고 흐르던 대동맥이며 뇌동정맥은 오래된 고단함에서 비로소 해방될 것입니다.

    포르말린에 잠겨 팅팅 불은 나의 몸은 몇 번 더 남은 할 일을 위해 대기할 것입니다. 끝으로 신참 의학도를 맞을 것입니다. 실습실 해부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 뼈와 내장이 무사히 해체되고 그들에게 오래 기억되어, 그들이 펼쳐갈 의로운 일에 쓰이기를 바랍니다. 흩어진 사이사이에서 흘러나올 내 한숨과 눈물이 마지막 부끄러움을 씻어주길 꿈꿉니다.

    저기, 삼문 너머 어머니의 모습이 환합니다.

     

     

     

    현대수필봄호 말 한마디로 등단 (2000)

    성남 문예아카데미 원장

    성남문예비평지 편집위원

    분당수필문학회, 시인회의 회원

    현대수필자문위원

    5회 한국산문문학상, 9회 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수필집 흐름

    사막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한눈팔기

    아포리즘 에세이 바람, 바람(2013년 우수도서 선정)

     

    - <選선수필> 2020 겨울호 통권 69호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