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박준_선잠 외 1편

갑자기여인 2021. 1. 25. 15:21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 선 아버지는/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박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서

'관객과 배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효치 시인_비천 외4편  (0) 2021.02.14
겨울산으로  (0) 2021.02.09
비맞은 붉은 열매는 더 아름답다  (0) 2021.01.25
너를 만나 멋지게 살고 싶다  (0) 2021.01.13
황동규 시집 _ 오늘 하루만이라도  (0) 2021.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