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이근화 시집_<<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갑자기여인 2022. 4. 16. 15:08

이근화 시집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_「악수」, 「약 15도」

 

악수                

 

거미줄은 나의 집

나만이 나를 매달 수 있고

나는 끝까지 나를 뜯어낼 수 있다

 

흘러서 고이는 이름들

 

나의 거울들

오늘은 괴물이 웃는다

몸이 검고 매끄럽고 슬프다

하염없이 노래를 부른다

 

시끄럽게 빠져나가는 것들

 

박힌 못을 빼내는 대신에

걸어둘 것을 서둘러 찾는다

열걸음 스무걸음

나머지 한발짝을 남겨둔다

누덕누덕 기운 자루를 끌고 간다

 

그 안에 누가 있는가

내가 끌고 내가 담는다

나를 담고 내가 당긴다

내가 없는 나의 목소리

 

빈 수레가 돌아가는 골목길

 

 

 

김영희(문학평론가) 해설_ 눈은 감으면에서 일부

 

시집은 「악수」라는 시로 시작한다.

'악수'는 존재의 분열에 착안하여 읽을 수도 있고,

인생의 지도 위에 잘못 둔 수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첫 페이지는

'물을 퍼붓듯이 세게 내리는 비'라는

뜻의 '악수'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시인의 밤이 깊을수록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는 더욱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약 15도                  

 

   벚꽃이 만발하고 오랜만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산들거린다. 이건 너무 정교해, 아름다워. 사실이 아니야. 내가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느라 입술이 파랗게 질리는 동안 등산복 차림의 아줌마 아저씨도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젊은이들도 구부정한 노인들도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든다. 잠시 멈춰 서서 허리를 뒤로 젖힌다. 유연하다 저 허리. 상상도 못할 일이야. 하늘과 벚꽃이 함께 담기는 순간 우리의 몸은 완성되는 것일까.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페이지가 이제 막 넘어간다.

 

   입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발걸음을 총총 옮기며 사람들이 지나간다. 이건 너무 낡고 지루해. 우습게 반복되잖아. 내가 울지 않아도 이 세계는 넘친다. 내가 웃는다면 조금 더 시끄러워질 것이지만. 당신의 발가락을 빠는 상상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돈도 사랑도 성공도 없지만 샘솟는 침을 어찌하랴. 진지하고 솔직하기를 바랐지만 얼렁뚱땅 두루뭉술 흘러간 내 인생아. 약 15도 허리를 젖히고 벚꽃을 바라볼 때 나는 어디로 가나. 어떻게 돌아오나. 왜 멈추나. 주정차 단속구간에서 경찰들도 빨간 봉을 든 채 벚꽃과 함께 흔들거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멈춰 선다. 호루라기 소리를 배경으로 팡팡 터지는 셔터들.

 

   떨어진 꽃잎들이 회오리를 일으킬 때 나무에게도 발가락이 생기는 걸까. 봄여름가을겨울 나무들은 얼마나 도망가고 싶겠어. 열대우림의 나무들처럼 우리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겠지. 이 판이 저 판이 되지 않도록 개판이 되지 않도록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 있고, 웃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울더라도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손목은 남겨둬야겠지. 그가 나의 손목을 잡고 놓지 않았고 그 이후가 생긴 것처럼. 그러나 이것은 신파다, 고전이다. 내가 긍정을 연습하는 동안 꽃물을 짓이긴 것이 핏물 같고, 어디선가 진짜 핏물이 뚝뚝 떨어져 고일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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