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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여름 가고 여름_디엥 고원 외 2편관객과 배우 2023. 6. 15. 15:54
<신간>
《여름 가고 여름》 채인숙 시집, 민음사
채인숙
1971년 경남 통영군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사에 「1945년, 그리운 바타비야」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디엥 고원 」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
가장 단순한 기도를 바치기 위해
맨발의 여자들이 회색의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른다
한 여자가 산꼭대기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태양이 한 개씩 태어난다
무릎이 없는 영혼들이
사라진 사원 옆에서 에델바이스로 핀다
몇 생을 거쳐 기척도 없이 피어난다
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며
천 년을 끓어오르는 화산 속으로
여자들이 꽃을 던진다
어둠의 고원을 거니는 만삭의 바람이
여자들의 맨발을 어루만진다
똑같은 계절이 오고 또 가고
안개의 진흙이
제 몸을 돋우어 사원을 짓는다
모두가 신은 없다는데
나는 오늘도 기도가 남았다
「나무 어미 」*
술라웨시 섬 깊은 숲속에서
아이는 죽어서도
자란다
사람의 젖을 받아먹으며
신의 언어를 전하고
잇몸에 뼈가 돋기 전에
살과 피의 무늬를 거두었으나
나무어미의 몸에
사각침대를 들여놓고
순한 잎술을 흔들어 부르는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다
살아 본 적 없는 생은
여태 모두의 것이므로
모든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만의 대문을 가져야 하므로
눈을 감고
천천히
나무가 되어
자란다
저도
어미가 된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따나토라자에는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아기가 죽으면 큰 나무의 몸통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아기를 묻는 풍습이 있다.
「다음 생의 운세」다시 태어나면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으리지붕 낮은 집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지나리뒷산에서 주워 온 나무 둥치로 의자를 만들어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아 먼 나라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으리내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아이들을 낳아 늦가을 볕 같은 곁을 내어 주리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아이 옆에서 함께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리누군가 떠났고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천변에서 들으리혼자 기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아, 내 어린 날의 바닷가 마을에 다시 태어난다면수심을 헤엄쳐 바위 틈에 낀 성게를 줍는 해녀가 되리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웃는 날이 많으리쉬는 날에는 문구점에 들러 색 볼펜을 고르고책상에 앉아 밑줄을 그어 둘 문장을 찾으리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먼 당신에게 편지를 쓰리어릴 적 사투리 고치지 않으리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리꿈에 속아 짐 가방을 싸는 일은 다시 없으리나무 캥거루와 쿠스쿠스의 서식지를 멀리서 그리워만 하리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으므로'관객과 배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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