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여름 가고 여름》 채인숙 시집, 민음사
채인숙
1971년 경남 통영군 사량도에서 태어나 삼천포에서 성장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했다.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사에 「1945년, 그리운 바타비야」 외 5편의 시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디엥 고원 」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
가장 단순한 기도를 바치기 위해
맨발의 여자들이 회색의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른다
한 여자가 산꼭대기에 닿을 때마다
새로운 태양이 한 개씩 태어난다
무릎이 없는 영혼들이
사라진 사원 옆에서 에델바이스로 핀다
몇 생을 거쳐 기척도 없이 피어난다
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며
천 년을 끓어오르는 화산 속으로
여자들이 꽃을 던진다
어둠의 고원을 거니는 만삭의 바람이
여자들의 맨발을 어루만진다
똑같은 계절이 오고 또 가고
안개의 진흙이
제 몸을 돋우어 사원을 짓는다
모두가 신은 없다는데
나는 오늘도 기도가 남았다
「나무 어미 」*
술라웨시 섬 깊은 숲속에서
아이는 죽어서도
자란다
사람의 젖을 받아먹으며
신의 언어를 전하고
잇몸에 뼈가 돋기 전에
살과 피의 무늬를 거두었으나
나무어미의 몸에
사각침대를 들여놓고
순한 잎술을 흔들어 부르는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다
살아 본 적 없는 생은
여태 모두의 것이므로
모든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자신만의 대문을 가져야 하므로
눈을 감고
천천히
나무가 되어
자란다
저도
어미가 된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따나토라자에는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아기가 죽으면 큰 나무의 몸통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아기를 묻는 풍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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