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인생은 길다/문효치

갑자기여인 2023. 8. 10. 14:39

윤재천 엮음 김 종 그림 《그림 속 아포리즘 수필 》

 

「인생은 길다」 문효치

 

 

    흔히 세월은 빠르고 인생은 짧다고 말한다. 나도 가끔 그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 속담에 '세월은 문틈으로 보는 말처럼 달린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은 세월이 너무 빨라서 인생이 짧음을 뜻한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느니 '인생여초로(人生如草露)'니 '소년역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등의 말도 있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의 이 시조 뒤에서 들려오는 그 한탄이 가련할 지경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인생은 충분히 길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는 그 분의 시할머니(나에겐 고조할머니)에게서 들은 말을 여러 번 되뇌곤 하셨다. '사람이 한평생만 사는 줄 아냐? 여러 평생을 사느니라' 할머니는 이 말씀에 늘 공감하셨다.

    할머니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조선 후기에 태어나 엄한 왕정시대, 일제 식민지 시대, 해방, 남북분단, 4·19와 5·16 등의 역사 변화 때마다 그분은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남편의 사망, 집안의 몰락, 아들의 월북 등의 사건들 또한 할머니에게는 각각 다른 인생으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다. 일본 식민지시대에서 태어나 해방, 최빈국 국민 그리고 정치적 격변을 거쳐 선진국 국민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세상 말고도 지주의 장손, 아버지의 월북, 집안의 몰락, 문학과의 만남 그리고 몇 번의 여성과의 사랑 등이 모두 각각 새로운 삶이었다.

   새로운 삶으로 이행될 때마다 그 나름의 독특한 인생이 전개되었고 그 삶의 중심에 희로애락의 크고 작은 일들이 펼쳐젔었다. 

   그리 생각하면 칠십 평생이 결코 짧지만은 않다. 삶의 쓴맛 단맛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요절만 없다면 인생은 결코 짧지 않다. 인생은 충분히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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