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채인숙/오래된 아침 외 2편

갑자기여인 2023. 8. 20. 15:33

 

↑ 한국·인도네시아 5인 시집

 

 

 

<오래된 아침>

 

   초록이 아닌 것은 어떤 집의 배경도 되지 않는 섬 나라로 왔습니다

 

   가져 온 여름 옷 몇 벌을 벽에 걸어 놓고 걷는 사람보다 서 있는 나무가 더 많은 길을 뒤꿈치를 들고 천천히 걷습니다

 

   해가 뜨기 전 기도를 끝내고 다시 날이 저물기 전에는 윗옷을 걸치지 않는 남자들이 집 앞에 몰려 체스를 둡니다

    눈이 내리는 풍경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자들은 푸른 히잡을을 쓴 채 나무 아래 좌판을 펼칩니다

 

    밤새 우린 약초 물을 바구니 가득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칩니다

 

    동네 공동묘지에는 새벽에 둔 꽃다발이 벌써 시들 준비를 하는데 사람들의 미소는 종일 싱그럽습니다

 

    지천으로 떨어진 열대 꽃을 주워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 오랜 이름들이 하나둘씩 잊혀갑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은 견디지 않아도 된다고 떠나온 나라는 아직 그립지 않습니다

 

 

 

<바틱>

 

글자가 없는 편지를 적습니다

 

검은 눈물을 찍어

기억도 가뭇없는

옛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계절도 없이 흔들리며

어느 날은

당신을 사랑하고

어느 날은 

당신을 증오했습니다

 

그립다는 말은

전할 수 없어 

차라리 다행입니다

 

<손수건나무>

 

지상의 모든 이별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어제 읽었던 소설의 마지막은 시시했다

주인공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손을 흔들었을 뿐이다

 

오래 전부터

거기 손수건나무가 서 있었던 것처럼

 

슬픔은 언제나 끝이 보이지 않아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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