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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이원화
종합문예지 한국작가 2012ㅣ 여름ㅣ 제 32호 신작수필 게재
둥근 나무토막 위에 긴 다리 솟대 한 쌍이 곧게 서 있다.
정면에서 보면 큰 것과 작은 솟대가 나란히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것을 90도로 돌려 앞에서 보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남몰래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듯하다. 한 뼘 반이 채 되지 않는 솟대 한 쌍이 오늘따라 나를 설레게 한다.
봄은 청소를 강요하고 있다. 어른의 잔소리뿐 아니라 누구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내가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것은 날씨 탓일까. 겨울이 닫힘의 계절이라면 봄은 열리는 때로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 오래된 아파트에 낡은 가구, 쌓여 있는 책들, 부엌찬장의 유행지난 그릇, 갖가지 흩어진 잡동사니를 보니 머리와 가슴이 뒤엉켜 온다. 늘 그것들을 "버려야지"하면서도 수 십 년 동안 껴안고 살고 있다.
일본의 컨설턴트라는 곤도 마리에 씨가 쓴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란 번역서가 신문에 소개된 것을 보았다. 낡은 것을 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인생을 재정리하자. 진짜 인생은 정리 후에 시작된다. 버려야할 것들 중에서 설레지 않은 것들은 과감히 버리라는 내용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버리고 싶은 것 중에서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설레기커녕 보기 싫은 것들뿐이다. 아들의 어린 시절 앨범을 보았다. 지금 아들의 자식들이 앨범 속 아들 어린 시절만큼 커 있다. 이미 사진은 낡고 낡아서 보정작업을 해 놓은 듯, 옛날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 그럼 전부 다 버려야할까. 풀풀 날리는 티끌 같은 실망을 안고 일어서는데, 먼지를 뒤집어 쓴 솟대 한 쌍이 눈에 띄었다.
이 솟대를 만난 것은 8년 전이다. 세종문화회관 정면계단 야외전시장에서 청계천 복원준공기념 특별전으로 '한국美의 재발견-이가락의 장승 ․ 솟대전'이 열리고 있었다. 계단 사이사이에 전시된 장승과 솟대는 보는 순간 놀라움과 감탄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난 듯 했다. 지방이나 시골 마을 입구에서 본어둡고 낡아 무서움까지 주던 그런 솟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아 함께 초등학교를 다니던 싱그럽고 푸근한 동무같이 편안하고 정다웠다. 그 것은 갓 켠 소나무나 참나무의 빛깔과 향기가 살아있는 듯하였다. 야외계단 위쪽에서, 길가 인도에서, 건너편에서 한참동안 구경을 하였다. 이런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한복차림의 이가락 선생이 다가와서 말을 건네주었다. 그때 구입한 것으로 처음에는 TV 위에서 대단한 대접을 받았지만 그동안 잊고 지냈다. 그것이 오늘 나를 설레게 한다.
솟대는 삼한시대부터 신을 모시던 장소인 소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나무와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신앙 대상물로 삼았다. 마을 사람들은 음력으로 정월 또는 10월 초, 동제 모실 때에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웠다. 이때 긴 장대 위에는 철새인 오리나 기러기를 올려놓고, 새해의 풍년을 바라는 뜻에서 볍씨를 주머니에 넣어 장대에 높이 달아매어, 이 볏가릿대를 넓은 마당에 세워두고, 정월보름날 마을사람들이 농악을 즐겼다. 그렇게 하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오는 솟대는 장승과 함께 마을신앙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신앙대상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지만, 옛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한국 역사와 문화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전통문화라 할 수 있다.
봄볕을 따라 동창들과 함께 산 속에 있는 전통찻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 집은 한국 전통미를 살리기 위해서인지 도자기 그릇들을 네 면 선반에 꽉 채워 도리어 무겁고 침침했다. 서로에게 눈짓을 하며 뒤돌아 나오려는데, 테이불 위에 솟대 하나가 마치 우리를 반겨주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무엇에 이끌리듯 솟대가 있는 테이불에 가서 앉았다. 솟대와 대화를 나누며 유년시절의 들판, 초가집 등 동여맸던 추억을 하나씩 풀어갔다. 일부 사람들은 솟대가 우상숭배라며 훼손하고 그 문화를 훼절하려한다. 이것은 너무 편협한 종교관이다. 솟대는 우리 전통 생활문화의 하나인 것이다.
깊어가던 지난 가을에 농림수산식품부장관배 꽃꽂이작품대회가 열리는 전시장에 갔다. 이 대회는 어느 다른 꽃작품대회와는 달리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해온 전통오브제를 이용한 꽃꽂이작품대회였다. 다양한 옛 것들이 작품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화로, 문짝, 설피, 시루, 나막신, 솥뚜껑, 붓, 호미, 맷돌, 골무, 등잔 등 잊혀져가는 우리의 옛문화가 아름다운 꽃꽂이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출품한 100여 작품 중에서 솟대를 이용한 작품이 최고의 대상을 받았다. 동네 어귀에 장승과 함께 천대를 받던 솟대였는데 고목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푸른 솔가지와 국화 그리고 솟대가 어울어져 마치 숲 속에 한 풍경을 보는 듯했다. 솟대를 하나의 오브제로 변형해서 작품에 삽입한 것은 잊혀져가는 옛날의 한 대상물을 새롭게 탄생시켜 현대에 제시한 획기적인 구성이었다.
현재는 전통을 밑받침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며 과거는 언제나 새로이 해석되어야한다. 전통이 없는 현대는 있을수 없다. 나무나 흙으로 만들어진 솟대는 자연의 한부분이다. 장대 위에 앉힌 새는 자유와 희망을 상징한다. 솟대뿐만 아니라 잊혀져가는 우리의 옛 것을 새로이 발굴하고 보존하며 또 계승해야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솟대'를 비롯해 우리의 옛 것을 모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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