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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하철역에서 시를 만나고/박경우
    한결문학회 2012. 4. 4. 21:29

    지하철역에서 시를 만나고

    박 경우(한결문학회 동인, 수필가)

     

    종각역에 막 도착하려는데 친구에게서 좀 늦겠다는 전화가 왔다. 친구는 전철을 타고 오다 이곳에서 나와 합류해, 부평까지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다. 부평에 사는 다른 친구의 생일을 축하할 겸해서 몇몇이 모이기로 했던 것이다. 시간을 보니 이십분 이상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전철이 쉬지 않고 오가는 곳에서, 소음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딱히 할 일도 없어 무심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스크린 도어에 적혀있는 시가 눈에 띄었다. 반가웠다.

    언제부턴가 지하철역에서 심심치 않게 시를 보게 되었다. 그때마다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읽어보곤 했는데, 오늘따라 시가 더 반갑다.

     

     

    자운영 꽃 피면

    정상기

     

    온 들녘에 자운영 꽃 피던 날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 많이 두고 떠나셨다.

    …………… 중략 ……………

    쉬어 간 황토길 빈자리 들녘에는

    자운영 꽃이 만장처럼 수없이 수없이

    허공으로 펄럭인다네.

     

     

    ‘자운영 꽃’은 꽃보다는 이름이 좋아서 좋아하게 된 꽃이다. ‘자운영’하고 불러보면 뭔지 모를 애틋함이 피어난다. 그 애틋함이 시와 어우러져 가만히 마음을 흔든다. 철없는 자식을 두고 떠난, 아비를 그리는 들녘.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들녘이 애잔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문창갑

     

    죽, 이라는 말 속엔

    아픈 사람 하나 들어 있다

     

    참 따뜻한 말

     

    죽, 이라는 말 속엔

    아픈 사람보다 더 아픈

    죽 만드는 또 한사람 들어 있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픈 사람을 위해 죽을 만드는 사람. 그에게 아픈 사람은 얼마나 절실한 사람일까. 얼마나 절실하면 아픈 사람보다 더 아플까. 죽, 이라는 말에서 죽 만드는 사람을 찾아낸 시인이 부럽다.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이 부럽다.

    친구가 종로 3가를 지난다고 했다. 시를 찾아 읽는 동안 시간은 빨리 갔다. 혼잡함이나 지루함은 없었다. 메말랐던 마음이 촉촉이 젖어왔을 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곳. 삭막하기 그지없는 곳.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 어떻게 이런 곳에 시를 입힐 생각을 했을까. 그리하여 눈길이 닿는 순간, 조금은 더 머물고 싶어지는 곳으로 만들었을까. 아주 잠시라도 일상을 털고 꿈을 꿀 수 있게 했을까.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엷게 어둠이 내린 하늘엔, 붓으로 한 획을 그은 듯 예쁜 초승달이 달빛도 곱게 떠 있다. 그 양쪽으로 가냘픈 초승달을 호위하듯 두 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선명한 모습이었다.

    달빛이 저리 고우니 별들도 많이 떴으리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처음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어둡기만 한 하늘이었다. 어둠이 차츰 익어가고 숨었던 별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얼마만인가. 저 수많은 별들. 어렸을 적 시골 살 때 이후론 처음인 듯싶다. 요즘에도 가끔 하늘을 올려다 볼 때가 있지만, 그때마다 별들은 꼭꼭 숨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만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무리를 이루며 반짝이는 별빛. 저 멀리 고요하게 떠 있는 초승달. 전에 없던 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날씨가 맑아서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혹 시를 만난 것이, 그 이유가 될까. 마음이 맑아지니 눈까지 맑아진 것이라고 그렇게. 시를 사랑하는 일은 마음속에 자연을 품고 사는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냥 지나치던 것도 어느 순간 마음에 와 닿을 때가 있다. 어떤 의미로 남을 때가 있다. 오늘 본 시가 내게 그렇다. 그러고 보니 시를 읽은 지도 꽤 되었다. 그래서일까. 보고나면 더 그리워지는 사람처럼 시가 그립다. 깊어가는 밤,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 만나듯 시를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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