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물속의 사막_기형도

갑자기여인 2019. 8. 10. 23:50

 

문학과 지성 시인선 (80)

《입 속의 검은 잎》_기형도 시집

 

 

 

 

 

 

물 속의 사막/기형도

                           

밤 세 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맛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해 장마 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다차다

 

장맛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