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한 글자 사전>-김소연

갑자기여인 2019. 8. 31. 21:47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에서

 

_감

어른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감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 여러 과일들이 함께 눈앞에 있을 적에, 하필 감부터 먹겠다고 손을 뻗는 다면 당신은 어른이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래왔다면 더더욱.

 

_갱

옛날에는 탄광촌에 있었지만 지금은 도처에 있다. 정주하지 못한 채로 떠도는 숱한 삶 속에.

 

_곰

봄날, 겨울잠을 자던 곰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는데 사람은 정작 어기적어기적 곰처럼 나른해진다

 

_귤

한 봉지, 아버지가 퇴근하여 현관문을 열 때 찬 바람과 함께 가져오던 것

 

_깡

힘의 마지막 단계, 젖 먹던 힘은 배짱에서 악착으로, 그리고 오기로, 그 다음 깡의 순서로 버전업 되어간다

 

_깨

'맛있게 드세요'라는 뜻으로 뿌려두는 것

 

_꿀

꿀을 빼앗긴 벌이 어떻게 그 사태에 대처하는 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_녹

녹이 슬어야 인간은 먹을 수 있다

 

_달

변해 가는 모든 모습에서 '예쁘다'라는 말을 들어온 유일무이한 존재

 

_닭

좋게 비유된 적이 없는 동물

 

_담

높고 우람할 때는 위화감을 주지만 낮고 아담할 때는 풍경이 되어준다

 

_덫

이것을 이용하면 언젠가 이것에 갇히게 된다

 

_뒤

성공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것이 대부분 구리며 성공을 추구하지 않은 자들은 이것이 대부분 아름답다

 

_득

이것 없이는 이제 사랑도 하지 않는다

 

_땅

생명이 싹트는 곳에서 돈이 싹트는 곳으로 바뀌었다

 

_링

동그라미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복서에게는 사각을 뜻한다

 

_명

기계는 너무나도 쉽게 단종되고 인간은 너무나도 오래 산다

 

_반

반만 먹고 반만 잔다. 반만 일하고 반만 논다. 반만 생각하고 반만 일한다. 반만 듣고 반만 본다. 반만 살아 있고 반은 죽어 있다. 시를 써서 그 반마저 지워버린다

 

_벌

죄를 지으면 받아야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받게 하기 위하여 죄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다

 

_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창안하였으나 권력을 비호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_벼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 같다

 

_병

놓치면 깨지고 품고 있으면 아프다

 

_복

오래 사는 것이 오복 가운데 하나라지만 나머지 사복 없이 오래 사는 것은 가장 큰 비참이다

 

_볼

뺨의 한가운데 부위. 어쩐지 뺨은 때리기 위한 곳 같고 볼은 뽀뽀를 하기 위한 곳 같다

 

_북

텅 빈 가죽을 두들기면 음악이 될 수 있듯이 텅 비어 있는 순간에 우리도 음악을 빚를 수 있다

 

_분

얼굴에 많이 칠하면 원하던 내 얼굴과 가까워지고 가슴에 많이 쌓이면 원하던 나 자신과 멀어진다

 

ㅡ붐

이것을 이으킨 자를 뼛속까지 소비하고 버린다

 

ㅡ빈

휑하지만 가장 좋은 상태

 

ㅡ뺨

한 사람의 복록이 표출되는 장소

 

ㅡ뼘

거리를 재는 단위, 아주 가까운 거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ㅡ샅

두 다리 사이를 뜻한다. 두 번 겹쳐 '샅샅이'로 쓰게 되면 '구석구석 꼼꼼하게'로 변용된다

 

ㅡ새

새는/맞아/치명상을 입어도/힘껏 난다/그리고/날면서/ 죽는다/죽어서/비로서 땅 위에 떨어진다//새는 달아나려고 계속 날고 있는 것일까/

달아나려고 난다면/죽어서/비로서 달아날 수 있다/떨어지는 것은/단념했기 때문일까/그렇지는 않으리라/날면서 죽은 것이다/깊은 상처에 시달려/단념하고/떨어져/그러고도 죽은 것이 아니다/나는 자세 그대로/그의 삶은 직각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다카하시 기쿠하루,「새1」전문

 

ㅡ솜

법을 어긴 권력에 법이 휘두르는 방망이

 

ㅡ쇼

대부분의 정치인이 국민을 향해 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행동 

 

ㅡ시

1. 이미 아름더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를 배반하느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ㅡ씨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ㅡ앞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이병률,「이 넉넉한 쓸쓸함」부분

 

ㅡ업

사춘기에는 'clean up' 'shut up'으로 꾸지람을 얻는다. 청년기에는 'dress up' 'give up'으로 갈등을 빚는다.

장년기에는 /show up' 'cheer up'으로 눈총을 받는다. 노년기에는 이 여섯 가지를 지켜야만 겨우 사랑을 받는다.

 

ㅡ울

찬물에 조물조물 비벼 빨아야 한다. 세게 비틀지 않아야 한다. 뉘어서 말려야 한다. 그래도 바닥에 물이 울음처럼 뚝뚝 떨어진다

 

ㅡ톱

밀 때가 아니라 당길 때 힘을 써야 한다

 

ㅡ판

판에 박히기 시작하면 권태로워지지만 판을 짜기 시작하면 의욕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