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이향아 시인 ㅣ 대표작_헛간을 지으며 외2편

갑자기여인 2019. 9. 7. 16:37

이 시대의 창작의 산실ㅣ이향아 시인

대표작

 

 

 

          헛간을 지으며      

                                      이향아 1963~1966년 현대문학 3회추천완료,시집 『황제여』 등 23권 한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등

                                                호남대학교 명예교수

 

 

 

   헛간 하나를 더 지어야지

   버리기는 아까운 빈병,  눈부신 빛깔의 저 일회용 포장지를 위해서,

그들의 절망을 위로할 은근한 놀이터를 지어야지

   하루살이 일간 신문지, 365일 아우성치던 초호활자의 안식을 위해서,

유행에 뒤쳐진 노래와 잊혀져 가는 영광을 위해서 집을 지어야지

   버릇으로 견디는 묵은 살림,

   알맹이만 하나씩 빼먹고 썩을 만한 것들은 썩어 물이 되어, 더러는 거

름으로 스며들고 더러는 정기로 떠도는,

   쓸개 없는 껍데기로 거리는 덜컹거린다,  바람이 불면 하늘이 공연한

뜬소문으로 어둡다, 설핏 눈감으면 조금씩 빠져나가는 소리, 아직도 빠

져가는 소리에 가위 눌린다

   버리기 싫은 추억,

   인연이 아니라며 돌아간 사람, 품고 죽을 비밀을 위해, 밀려나는 고전

을 위해 부활을 꿈꾸는 집을 짓는다

   마른 심지 끝에 입김만 불면 불이 붙을 것 같은  아직은   멀쩡한 정신

을 위해서, 결국 우리들 은둔을 위해서 잠복을 위해서,

   헛간이라고 불리고야 말 허무의 궁전을 짓는다

   껍데기 한 칸을 더 늘린다

 

  

 

               그것이 걱정입니다

 

짓밟히는 것이

짓밟는 것보다 아름답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피 흐르는 상처를 들여다보며

흐르는 내 피를 허락하겠습니다

상처 속 흔들리는 가느다란 그림자

그 사람의 깃발을 사랑하겠습니다

천년 후에 그것이 꽃이 된다면

나는 하겠습니다

날마다 사는 일이 후회

날마다 사는 일이 허물

날마다 사는 일이 연습입니다

이렇게 구겨지고 벌집 쑤신 가슴으로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을는지 몰라

나는 그것이 제일 걱정입니다.

 

 

 

                  아지랑이가 있는 집

 

집에는 내 부끄러운 풍속이 있다

밥통 같은

간장종지 같은

요강단지 같은

집에는 부스러진 내 비늘이 있다

머리카락 같은

손톱 같은

살비듬 같은

집에는 내 아지랑이가 있다

빨 · 주 · 노· 초 ·파 · 남 · 보 세어 보는 색깔

집에는 슬픈 껍데기 얼룩진 콧물

그보다 치사한 인정이 있다

집에는 내 냄새가

고집이 있다

앉아서 돌이 되는 집념이 있다.

                                                    (《月刊文學 》607, 2019, 9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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