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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의 <마음사전>_마음의 절연체수필은 시도다 2019. 8. 20. 23:46
김소연의《마음 사전》중에서
마음의 절연체
절연체로 둘러싸인 그릇이 온도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때마다, 우리도 이 순간에 멈춰 있자고 말하고 싶어진다. 더 뜨거워지지 말자. 더 차가워지지 말자. 마개를 꼭꼭 닫아두자. 당신과 나라는 그릇이 성능 좋은 절연체를 두른 보온병과도 같은 지금.
상처의 전시회
누군가 상처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나면, 타인의 이미그레이션 게이트를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비자가 그에게 발급되곤 한다. 한 사내가 눈물 뚝뚝 흘리며 과거지사 중에서 상처의 베스트 몇 가지를 나열하고 나면, 콧대 높은 그 어떤 여자도 마음을 줄 정도로, 상처의 전시회는 대개 성황리에 끝마쳐진다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내 다섯 손가락으로 당신 손등을 꽉 감싸고
당신의 손바닥을 내 손바닥에 빈틈없이 맞붙이고
당신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와
봉합된 이모양을
눈 떼지 않고 바라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이 구겨진 길을 따라 걷는다
한 쌍의 다정한 말똥구리처럼
지구를 굴리며 걷는다
태양을 향하여 직진으로 걷는다
당신의 저쪽 손과 나의 이 손이
지문 하나 남지 않게 닳고 닳도록
그러므로 말똥 같은 지구를
우주 벼랑 끝으로 굴려 떨어뜨리도록
당신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봉합된 채
이 조그만 지구에 그늘과 밤을 수천 번 드리울 때
우리 뒤에 깔린 반듯한 비단길을
아무도 걷지 말거라
벼랑 끝 노을이 우리 이마에 새겨주는 불립문자를
아무도 읽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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