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김동리의 <세월>_ 그립고 아까워서

갑자기여인 2019. 12. 29. 20:44

 

 

“ 선생님의 마지막 육성은 내게<세월>이라는 시로 남아 있다. 아마 1990년도 1월로 기억한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따금씩 모이던 몇몇이 청담동 댁을 찾았다. 몇 가지 나물과 생선찜 등으로 차려진 선생님 댁의 상차림은 늘 비슷하여 친근하였다. 우리는 부엌과 잇닿은 식당 방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마냥 유쾌하게 떠들어대고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의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부지런히 주방을 오가며 술을 데우고 나르셨다. 선생님의 방식대로 따끈하게 데운 정종병 아구리를 분홍색 줄무늬의 작은 타월로 감싸쥐고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 잔을 일일이 채워주셨다. 그리고 "내 시 좀 들어봐라" 하시며, 눈을 지그시 감고 두 손으로 예의 그 분홍 타월을 비비 틀어 짜는 포즈로 서서 <세월>을 들려 주셨다.”

                                                                                                                                        오정희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 중에서

 

 

 

 

김동리의

            < 세 월 >

 

 

세월 가는 것이 아까워/ 아무 일도 못한다. 그것은/여행을 떠나가기에도/

사랑을 하기에도 아깝다/ 책을 읽거나/ 말을 건네기에도  아깝다/ 전화를

받고/ 손님을 맞고 하기에는/ 더욱 아깝다/아까워 세월을/ 아무것에도 쓸

수가/ 흘러가는 모든 순간을/ 앉아서 똑바로 지켜볼밖에/ 앉아서  지치면

누워서라도,/ 누워서도 지치면/ 다시 일어나 술이라도 마실밖에/ 술은 마

실수록 취하는 것/ 아무리 마셔도/ 취해 있어도 나는 그/ 달아나는 세월의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눈 지그시 감았어도 / 눈 딱 벌려 떴을 때

처럼/ 달아나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 그냥  그렇게 지켜볼 뿐이라/

가는 구나 가는 구나/ 그렇다 그냥 지켜볼 뿐이다

 

 

                                                               2018년 인도네시아 스까부미, 해리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