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식 시력 50주년 기념시집
『사행시초2』
강우식시인은 1963년에 사행시초를 시단에 처음 선 보이고,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1974년 첫 시집 『사행시초』를 펴냈다.
그는 50년 후에 다시 써보는 시적 감정의 재생현상, 그 차이가 어떻게 나타날까, 다소 의도적이지만 그의 능력을 믿고 50년 전에 쓴 첫 시집을 바탕으로 다시 『사행시초2』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세계에서 최초의 시도이며 300 여 편의 작품이 한 권에 함께 수록되어 독자들에게 풍성함을 던져준다. 요즈음 쓴 사행시를 앞으로 놓고 젊은 날에 쓴 시를 뒤에 놓는다.
<사과 껍질>
껍질이 없다. 부끄럽게도 어느새 다 벗겨진 채
우리 내외는 세상모르고 청등벌거숭이로 살았다.
땡볕에 쪽박신세로 나앉은 비탈길
아내에게 시집 올 때 껍질 몇 개 부탁할 걸 그랬다.
내외여, 우리들의 방은 한 알의 사과 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인 듯 해맑은 햇볕 속
누가 이 순수한 외계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 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눈>
고향에 눈이 많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간 좋아한 소녀 집 앞에서 언 손 불며 눈사람을 만들어
나인 듯, 순백이 내 마음인 듯 세워두고 돌아섰던
아득한 옛날이 아련히 가슴 긋고 지나갔습니다.
바람만 바람만 하고 살아온 그리움이
죽어도 약을 써야 될 아픔이라면
사랑이여, 그녀 사는 이승에 와 한 닷새쯤
남도의 한 고을이 물이 되도록 울어버리자.
<아파트 1층>
온갖 들고나는 잡소리가 다 들려서 괴롭지만
가끔 고층에서 새처럼 날지도 못하면서
물먹은 솜뭉치 되어 떨어져 자살하는 사람이
가족 일이 없다는 데 안주한다.
뻐꾸기도 목청 틔어 우는 여름 아침에
사람이라고는 부모만 알던 아기가 죽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무척 닮은 벽시계도
일 분쯤 뚜우뚝 울며 지나갔다.
<새집>
전지剪枝한 겨울 가로수 꼭대기에
철거되지 않은 무허가 건물 같은 새집들이 있다
얼기설기 엮었지만 빈틈없이 공들여 지은 집
새끼 치고 한철 편히 나라고 남겨둔 인심人心.
변두리에선 바람에 뜬 쓰레기들이
비둘기 떼처럼 날아가다 앉는다
살아갈수록 하찮은 일들에 새로운
뜻이 주어진다. 집이 무엇이란 걸 알겠다
<첫눈>
별들도 총명하게 떠는 시베리아처럼 푸르게 차다
모처럼 부전지를 붙이고 싶지 않은 산뜻한 하루다
온갖 역사의 회한으로 결빙된 머리통
대포 맞은 듯 시원하게 뻥 뚫렸다. 신의 축복이다.
어둠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시간이
이 국토에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역사의 회한을 희뜩희뜩 불러일으키며
체제도 없이 하이얀 눈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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