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연필을 깎으며_이해인

갑자기여인 2020. 2. 6. 20:27

                                                                                       ↘" ......94, 운정회 꽃꽂이 작품집"에서

 

연필을 깎으며/이해인

 

오랜만에

연필을 깎으며

행복했다

 

픗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깎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깎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채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깎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웬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이해인 시집《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