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김종섭_어느 일상, 이희자_빗소리를 듣다

갑자기여인 2020. 3. 5. 20:33

《月刊 文學》613

2020년 3월 기획특집에서 옮김

 

 

어느 일상-사진을 정리하며/김 종 섭

 

 

바람 스산하고 날은 흐리다

가끔 빗방울 떨어진다

아내가 외출한 뒤 묵은 사진첩을 꺼내

잊혀진 얼굴들과 작별하고 찢는다

식탁 쟁반엔 바나나와 체리

떡과 미숫가루도 있다

커피는 이미 식은 지 오래

공복의 식욕을 마구 씹는다

어떤 놈은 굵고 단단한, 또 어떤 놈은 작은

한 놈은 노란 껍질을 힘없이 벗고 늘어진다

빈속을 채워주는 슬픈 열매의 잔해들같이

지나온 내 삶의 족적을 거슬러 가 본다

오래된 흑백 속

그와 내가 함께 해변을 거닐며

어깨동무한 젊은 얼굴에 시선이 머문다

갑자기 허리에 통증이 도진다

기억에 묻혀 탁자의 정물이 되어선 안 된다

아픈 허리를 펴고 비 내리는 길로

뒤뚱뒤뚱 걷는다.

 

 

 

빗소리를 듣다/이 희 자

 

 

빗방울들이 슬픈 소리를 낸다

 

낡은 우산도 재산이 되던

먼 옛날, 빌려 주기보다

빌려 오는 날이 많았던 어머니

 

우기의 어머니는

늘 젖어 있고 등굣길이 막힌

나는 우는 날이 많았다

 

빗줄기는 여전히 세찬데

억장이 무너진 어머니

마른 가슴만 치시더니

 

이른 아침

빗방울들이 슬픈 소리를 낸다

어두운 하늘에서

어머니 슬피 울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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