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황동규_옛 지도, 겨울 간월도에서

갑자기여인 2020. 2. 25. 22:26

황동규 시집《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옛 지도/황동규

 

 

옛 지도 넘기다 보면

그냥 들(野)이라 적힌 곳

하 전엔 그런 곳들이

무작정 들어간다

가슴에 차는 풀 위로

나비들이 갓 풀먹인 날개를 달고 날고 있다

잠자리 줄지어 뜨는

숨은 못이 있어

물 속에 사타구니 담근 채

부들이 모여 수군대고

마름이 가득 떠 있다

마름을 헤치며 개구리 하나 헤엄치고

바싹 물뱀이 따른다

눈뜨면

그냥 들 야(野)

개구리가 먹혔는가, 안 먹혔는가?

눈 다시 감으면

개구리가 풀섶에 뛰어오른다

뱀은?

크고 작은 삶들이 모두 촉촉하다

되돌아보라

증발시킨 시간마저 없는 인간들, 우리의 지금 삶!

잠시 되돌아보라

 

 

겨울 간월도에서

 

 

영하11도

하늘도 땅도 시퍼렇다

저런, 저 철새들

한 줄 길게 두 줄 짧게

그 뒤론

한쪽 길고 다른 한쪽 짧은 쐐기 모양 흩트리지 않고

허공을 건넌다

죽음같이 텅 빈 겨울 하늘에 황홀한 좌표 그리는 저 선(線)들!

인간의 행로보다도 정연한 저들의 행로가

인간을 하늘에 줄 서게 만든다

저 중에는 과부 홀아비 고아도

왕따당한 자도

노숙자도……

선들이 휘돌며 성긴 눈발로 내려와

목을 감는다

내 성대(聲帶)가 기러기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