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집《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옛 지도/황동규
옛 지도 넘기다 보면
그냥 들(野)이라 적힌 곳
하 전엔 그런 곳들이
무작정 들어간다
가슴에 차는 풀 위로
나비들이 갓 풀먹인 날개를 달고 날고 있다
잠자리 줄지어 뜨는
숨은 못이 있어
물 속에 사타구니 담근 채
부들이 모여 수군대고
마름이 가득 떠 있다
마름을 헤치며 개구리 하나 헤엄치고
바싹 물뱀이 따른다
눈뜨면
그냥 들 야(野)
개구리가 먹혔는가, 안 먹혔는가?
눈 다시 감으면
개구리가 풀섶에 뛰어오른다
뱀은?
크고 작은 삶들이 모두 촉촉하다
되돌아보라
증발시킨 시간마저 없는 인간들, 우리의 지금 삶!
잠시 되돌아보라
겨울 간월도에서
영하11도
하늘도 땅도 시퍼렇다
저런, 저 철새들
한 줄 길게 두 줄 짧게
그 뒤론
한쪽 길고 다른 한쪽 짧은 쐐기 모양 흩트리지 않고
허공을 건넌다
죽음같이 텅 빈 겨울 하늘에 황홀한 좌표 그리는 저 선(線)들!
인간의 행로보다도 정연한 저들의 행로가
인간을 하늘에 줄 서게 만든다
저 중에는 과부 홀아비 고아도
왕따당한 자도
노숙자도……
선들이 휘돌며 성긴 눈발로 내려와
목을 감는다
내 성대(聲帶)가 기러기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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