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배우

달팽이와 백석의 <수라>

갑자기여인 2023. 7. 8. 15:34

아파트에 수요일마다 야채차가 옵니다

뚱하지만 밉지 않은 아줌마 사장님과 '새로운 게 뭐 있어요?' 하며 인사를 나누었지요

사장님은 상자를 열더니 나물을 들어 올렸습니다.

처음 보는 부지깽이나물이라 자세히 보는데, 시든 잎에 달팽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거 제주도 애월읍에서 온 것이어여 허허'

'나에게 주세요'하며 검정 봉투 속에 그걸 넣었지요

그렇게 해서 제주도산 달팽이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침마다 달팽이가 사는 플라스틱 통을 씻고 김치냉장고에 둔 부지깽이나물 몇 잎을 바꿔 넣어주었지요

다음날 통을 들여보니 검정 털실 오라기를 물에 불린 것 같은 똥도 보였습니다

  

 

며칠 후 부지깽이나물이 다 떨어져 우리가 먹는 상추를 넣어줬더니 신이 나서 먹습니다

왕성하게 상춧잎을 먹고 슬슬 기어 다니더니 그만 똥을. ᄏᄏ

인터넷에 보통 달팽이는 애호박을 좋아한다는 글이 있기에 얇게 썰어줬더니 먹지 않더라고요

3일 후 야채차가 와서 부지깽이나물을 사려 했는데, 생산이 끝이 나서 그 대신 제주도 비름나물을 샀습니다

 

이번에도 먹지 않더라고요. 비름나물은 달팽이의 고향인 제주도에서 온 것이라 먹을 줄 알았는데. 플라스틱 통 언저리에서 시위하는 듯 몸을 뻗으며 기어 다니기만 해요

30도가 넘는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마트에 갔습니다. 구매한 상추를 넣어줬더니 작게 크게 구멍을 내며 먹기 시작했습니다

장맛비 소리로 늦은 아침에 달팽이 통을 씻으며 시든 상추를 뒤지긴데, 달팽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탈출했을까, 잎을 털었더니 싱크대에 떨어졌어요. 깜짝 놀라 숨죽이고 쳐다보았더니, 수도 파이프를 타고 수월히 꼭지까지 기어오르더라고요

 

그동안 플라스틱 통 안에서 얼마나 덥고 답답했을까요?

 

 

엄지손톱보다도 작은 달팽이와 한 달 반 넘게 가졌던 봄 날씨 같은 작은 대화에 감사하며

비 내리는 날 아파트 입구 감나무 아래 상추 몇 잎과 함께 놓아주었습니다. 순간

백석 시인이 쓴 <수라>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그까짓 것, 하찮은 거미 새끼를 보내면서….

'가슴이 짜릿하다'라고 쓴  백석 시인의 표현이 좀 과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던,

바로 나 자신도 제주도 달팽이를 자연으로 보내면서 서럽고 가슴메이고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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